꿈꾸던 미래가 현실이 될까?.
오랜만에 펜을 꺼냈다. 진짜 만년필, 잉크를 채워 넣어보았자 말라비틀어진 펜촉이 응답을 하지 않을 것 같아 뜨거운 물을 잔뜩 부운 작은 컵에 퐁당퐁당 던져 넣었다. 맑고 뜨거운 물에 금방 잉크가 퍼져 나온다. 아무리 다시 따라 넣고 떠 넣어도 다시 잉크가 퍼져 나온다. 이만하면 되겠다 싶어 손가락을 집어넣어 펜촉을 꺼내는 사이 내 손끝에는 파란 물이 들었다. 아직 내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직장인의 흔적 같다.
만년필을 썼던 건 회사에서가 마지막이었다.
까마득히 먼 기억 같지만 고작 일 년 하고도 몇 달, 그 사이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 매일 같이 끼고 살던 업무일지, 작은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 내려갔던 나의 해야 할 일 목록들, 일이 사라짐과 동시에 수첩은 사라졌다. 여전한 것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아이패드, 그마저도 쓰는 앱이 달라졌다. 필통 속을 가득 매웠던 필기구들, 지웠다가 썼다를 반복할 수 있었던 비싼 볼펜, 잡다한 것들을 몽땅 집어넣었던 파우치,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갔을까.
내 청춘을 쏟아부었던 그 날들 말이다.
백수는 할 일이 없어서 항상 바쁘다. 세상 일에 가장 민감하지만 나의 사소한 일상에 가장 둔해진다. 온갖 사회적 이슈들이 그저 바쁘다는 이유로 뒷전이었던 때와는 달리 뉴스는 나의 일과다. 덕분에 한 번쯤은 회사에서 들었던 이름들을 새롭게 다시 만나고 있다.
나의 회사의 모태가 되어준 회사 사장은 잠시 풀려났다. 생각해 보니 그분의 회사를 위해 일했던 게 내 회사 생활의 반이다. 아직도 회사를 다니는 이들의 미래는 모두 그분의 말 한마디에 달려있다. 제주도 프로젝트라 좋아하며 시작했지만 사 년이 다되도록 진전 하나 없었던, 계속 자괴감을 만들어내다 반항을 하고 도망쳤지만 결국 다시 끌려왔던 프로젝트의 건축주는 검찰 조사 중이다. 그 와중에 내 새끼 같은 아이는 공기업이라 다행히도 뉴스에 나오진 않는다. 내 옆 옆 팀의 오랜 숙제였던 프로젝트는 몇 백명의 사람들이 부정하게 입사해서 곧 잘린다 하고 옆 팀의 자랑이었던 프로젝트의 건축주 역시 알고 보니 부정한 청탁이 드러났단다.
그럴 줄 알았다. 다 그런 곳인 줄 몰랐나.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 또 그렇다. 도대체 나의 청춘은 어떤 일을 했던 거야?
뉴스에 나오는 이름들에게 돈받고 일했다고 내 청춘마저 나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여전히 찜찜한 한구석이 남는다.
나는 어디 하나 소속하지 못한 채 오늘도 이리저리 손가락질을 헤댄다. 그나마 내 어깨에 걸친 짐이 다 사라진 지금은 소리내 욕할 수 있다.
내 청춘이 사라지던 지난 날에는 소리 내서 누군가를 욕하지 못했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겐 칼을 좀 꽂았지만 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리 깨끗하고 맑아 보였던 적이 많지 않았다. 친한 사람 혹은 가족을 위해 입사청탁을 하는 세상이다. 몇 천억이 오가는 공사판에서 로비 없이 벌어지는 일이 있겠는가. 못해도 몇 백억은 쥐고 시작하는 프로젝트였다. 아주 흔하게 몇 조가 오가기도 했다. 그 몇 조가 실제로 시행되었다면 어딘가엔 또 다른 지옥이 펼져졌을 텐데, 다행히도 그런 불행은 한두번에 그쳤다.
돈 앞에 누군들 무너지지 않으랴. 실적 앞에, 명성 앞에, 지위 앞에 누군들 욕심내지 않겠는가. 주변의 좋은 사람들 중 완벽주의에 가까운 자신을 위해 일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더 좋은 평가, 빠른 승진 그리고 수주에 매달리는 허수아비가 되고 싶어 하는 최후의 목표. 나조차도 맹렬히 그것을 향해 달렸다. 당연하지, 그럴 게 아니라면 회사를 왜 다니겠는가.
그 속에서 함께 살다 나왔기에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그 속에서 살아봤기에 꿀맛도, 이면의 시궁창 맛도 안다.
그럼에도 가끔 직장인의 흔적이 머무는 책장 앞에서 필기구를 정리한다. 펜에 잉크를 넣고 괜스레 끄적거린 오늘처럼. 마치 그 날이 아직도 이어져 있길 은근히 바라는 것처럼. 지난 시간이 사라졌다 부정하는 것은 나를 지우는 것과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날들이 내게 남긴 건 등록금을 갚고 결혼을 하고 백수가 되어서 여행을 떠날 정도의 여유이다. 감사하게도 청춘과 맞바꾼 경력과 경제력은 덕분에 모든 것이 넉넉하다.
같은 퇴사자라 그런지 백수들의 외침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누군가는 그러더라. 특별히 싫은 사람도, 괴롭던 일도 없었다고. 그저 더 늦기 전에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은 회사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일이 가득했던 따뜻했던 날들이라고. 참 좋은 회사였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고. 뭔가 도망치듯 나온 사람들, 벗어나고 싶다는 외침을 하는 이들과는 다르다는 선을 긋는 듯했다.
나의 청춘이 사라졌던 수많은 야근의 밤이 비록 지금 줄줄이 드러나는 비리의 온상이자 응징해야할 이을 위한 날들이었지만 만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함께 행복하고 함께 슬퍼했던 시간이었다. 매번 숨쉬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곳은 아니었다. 어디든, 누구를 위하든 사람이 일하고 있으니까.
퇴사를 해서 새로운 세상을 찾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퇴사를 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겠다. 너무 훌륭한 생각이다. 그런데 직장인들의 세상 역시 시작은 다르지 않다. 누군들 괴물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살았겠는가. 세상엔 드러나지 않는 괴물이 많다. 좋은 선배, 상사의 탈을 쓰고, 훌륭한 임원, 희생하는 경영진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그들도 시작은 뉴스를 도배하는 이들의 시작과 같았을 것이다. 아무리 다름을 꿈꿔보았자 세상은 이미 큰 우물, 작은 우물의 차이일 뿐 같은 지하수를 길어올리고 있다.
성공한 혁명은 혁명을 배신한다. 어쩌면 성공하려면 배신이 필수일지도.
성공한 퇴사자는 그토록 고용되고 싶지 않았던 직장을 만들고 누군가를 고용해야 한다. 그것도 그토록 싫어했던 방법을 써야 돈이란 걸 벌고 성공했다 으쓱할 수 있다.
매일 평범한 사람들이 괴물이 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 강하게 믿게 된다. 맹렬하게 자유를 갈구하던 깨어 있는 사람들이 더 쉽게 망각한다. 회사를 뛰쳐나온 똘똘한 놈이 악독한 사장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끌려가는 높으신 분들의 최후를 지켜보며 크게 해먹은 사람이라 저렇게 뉴스까지 나는 거지, 작게 해먹은 사람들은 잡혀가지도 않는다며 혼자서 헛헛하게 웃었다.
이제 슬슬 일을 해야겠는데, 망하기 딱 좋은 심리상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