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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Mar 05. 2018

아무리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것

직장인이 백수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

9년의 직장 생활을 보상하기엔 아직 너무 짧은 1년의 백수생활.

이번 달로써 백수를 시작한 지 1년 하고도 4개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똑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찌푸려지는 뉴스가 나오고 새로운 영화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포털을 도배하는 명제는 '삶과 일의 균형'이다. 내게는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뉴스이지만 전혀 몰랐던 듯 사람들은 억울해하고 놀라워한다. 그럴 줄은 몰랐던 사람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사건 사고들을 보며 직장 생활, 사회생활을 하며 내가 얼마나 무덤덤해졌는지를 깨닫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대단한 뉴스라도 백수의 일상을 뒤흔든 사건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회사를 다녔다면 달랐을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재벌 총수들이 심판의 기로에 서있다. 백수의 삶에서 강 건너 불구경이자 기왕이면 제대로 된 재판과 엄격한 법 적용을 바라지만 만일 내가 아직도 회사에 다녔다면, 달랐을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의 운명은 총수의 신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저 꼭대기의 한 사람과 몇 천명, 아니 몇 만 명이 넘을지 모르는 일개미들이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어차피 인력은 인사팀에서 관리하고 중간 관리자들과 임원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위에서 입김을 불면 아래에서는 폭풍이 일어난다. 호랑이가 자리를 비우면 동네 고양이가 호랑이 인척 야옹거리기 시작하는 법이다. 

제일 꼭대기의 한 사람을 비호하기 위해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가장 아래에 내려올수록 의도가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얽힐수록 도착점은 시작점과 그 궤도를 달리한다.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직장인들의 생존 여부가 갈린다. 사실 이유 따위를 안다고 달라질 리가 없기에 그 누구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나 역시도 희망퇴직을 선택하며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를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나의 선택이라고 결론 내렸으니까.

백수가 되고 직장인의 때가 조금 씻겨져 가고 있다. 점점 나와 직장인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나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왜, 묻지 않았을까. 


"희망퇴직은 누가 결정했나요?"

"이 회사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나는 이 회사에서 어떤 존재인가요?"


그 때나 지금이나 대답을 해줄 이가 없다. 질문을 던진다 한들 허공에서 맴돌 뿐, 잠깐 수면에 일렁이는 파동에 그칠 뿐,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비에서 아들로 세습되는 이상한 기업 문화가 대기업일수록 견고하고 단단하다. 만약, 내가 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창구가 있다면 그 창구를 막는 이들은 총수를 비호하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직장인일 것이다. 같은 회사에 소속되고, 같은 명세서를 받으며, 같은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청약을 붓고, 같은 나이 때의 자식들을 키우고 있는, 같은 세대의 같은 직장인, 뒤돌아서 대화하면 그네들의 마음도 이해가 갈 수밖에 없는 똑같은 직장인이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세차게 발길질을 한다고 해도 호수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호수에서 헤엄치지 말고 그냥 날아오르는 수밖에는.

백수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하루의 일상은 그 넓은 하늘을 나는 것과 같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저 앞의 먹구름이 내게 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다. 

더 멀리 보고 더 쉽게 지치기도 한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대신 다시 돌아갈 호수를 찾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러게 왜 떠나냐며 말리던 이들이 떠오를 때도 있다. 그러나 날아보지 못한 자는 이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저 나는 참 행복하고 편안하다는 말 밖에는. 각자의 선택이다. 


뉴스를 뒤엎는 각종 인사청탁의 뉴스가 새삼스럽지 않다. 내가 이상한 내지는 대단한 회사를 다니긴 했나 보다. 뉴스에 나오는 기업들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한 번씩은 다 보았으니까. '저런 회사가 있었단 말이야?'라고 놀라고 싶지만 새삼스럽게 '저게 뉴스가 되는구나'라는 생각만 하게 된다. 익숙한 그 일들이 이제와서 놀랄만한 뉴스거리라고 떠드는게 가끔 가증스럽기도 하다.

내가 만일 9년이란 시간을 그 회사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일반일들을 만나고 작은 가게, 작은 빌딩, 한 가정의 집을 설계하는 아뜰리에를 다녔다면 어땠을까. 저 정도일 정도 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을까. 마음 한편으로 부끄러움과 민망함, 어쩌면 나 역시도 세상의 부조리함을 떠받들고 있었던 일개미의 하나로써 일조했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그런데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게도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본래 다 그렇게 돌아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채, 백수로 살아가는 지금에서야 그 말에 반기가 들어진다. 그때는 그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비록 작은 일개미이지만 언젠가는 그런 세상을 조장하는 큰 일개미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이미 그런 세상에 발을 담근 채 수긍하며 살고 있었으니까.


직장인들이 기업을 바꿀 수는 없다. 이미 연봉 계약서를 쓰며 저절로 숙여지는 몸과 마음을 갖게 된다. 직장인들에게 기업의 주인이 되라거나 자정 하라는 이야기는 현실을 모르거나 바보 내지는 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바꿔할 것은 기업 자체가 아니라 비슷한 마음으로 물들어버린 나와 똑같은 직장인들 모두이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삐죽 튀어나와 '우린 모두 잘못 일하고 있는 거야' 내지는 '잘못된 회사를 방치하고 있는 거야' 라고 외치는 순간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외면하던 것을 들키며 모두가 부끄러움에 빠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개미들은 또렷하게 정직한 목소리를 내는 일개미를 싫어하고 외면한다. 삐죽 튀어나온 못은 뽑히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못으로 다시 박힌다. 모두에게 칼날이 들어오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은 한, 대부분은 같은 직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당사자가 아닌 이상 무관삼과 외면으로 일관한다.


직장인들은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모순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수한 탈출 욕구를 매일 같이 삼킨다. 뒤돌아서서 욕하지만 내가 발 담근 물이 더럽다는 사실만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 일하고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그렇게 성취감을 쌓아가는 것일뿐인데 뭐가 잘못이라는 거지? 어차피 일개미 하나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것은 없는데. '그러다 이해하게 된다. 그토록 싫었던 앞선 선배 세대의 어쩔 수 없는 상황과 그들이 이룩해 놓은 신기루 같은 조직문화를.  어느새 자신이 욕하던 상사와 닮아가더라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논리에 빠지게 된다.


백수가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한마디로 저 멀리 갔던 정신이 돌아오며 나와 상관없는 일들로 느껴지는 뉴스를 보면서도 쉽게 욕하지 못한다. 좌절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울리는 특혜 받은 사람들, 알고 보면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 나름 대로는 억울하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하필 걸렸을까. 


직장을 다니며 이런저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보면서도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지 못했던 때와 달리 지금 나는 또 다른 걱정을 한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들만 사라진다고 구조적으로 치밀하고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관례가 사라질까. 과연 지금 뉴스가 되어 모두가 비난하는 것을 계기로 일개미들이 각성해서 스스로 바꿔나갈 동력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너무도 쉽게 채워지고 한번 걸린 수법으로 다시 시도하지 않을 테니, 좀 더 교묘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직장인이 백수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절대 악의 고리는 누구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 나약한 일개미들 조차도 그 속의 부품이니까. 일개미는 자신의 한계와 존재감을 점점 더 잘 알게 될수록 그 속에 파 묻히거나 튕겨져 나가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 순간이 가까워졌음을 느낀다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기억하자. 비록 나의 선택은 백수였지만 그게 꼭 정답은 아니다. 

도시를 볼 때마다, 정확히 빌딩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저 속에 얼마나 많은 직장인, 일개미들이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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