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nA Feb 14. 2018

백수천국

지옥에  사는 직장인의 오해

[구직급여=실업급여] 신청자가 사상 최대라는 기사를 읽었다.

백수천국이라는 세상 앞에 놓여진 수많은 재취업자, 예비창업자, 장기백수자들, 환영한다.


일단 천국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질꺼다. 수많은 퇴직자들이 써내려간 여유, 나를 찾는 시간, 직장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등등의 수많은 감정기복이 스쳐지나갈 것이다. 그 안에서 싸우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과 과도한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을 특별하다 여기지만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인 보편적인 면이 있다. 자신의 의지든, 타인의 선택이든 백수의 세상은 ‘나’에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 내 속의 전쟁이 가족의 평화를 깨트리고 하고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내 속의 전쟁에 자신이 죽어가기도 한다.


‘퇴사’는 유행이 아니다. 불행도 아니다.

살다보면 겪게되는 변화의 일부이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벗어나고 싶은 불안일테고, 그마저도 익숙한 누군가는 또다시 찾아온 정처없는 방랑일 것이다.


위로가 가득 담긴 느리게,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의 기회로 삼으라는 따뜻한 글과 어서 빨리 계획을 짜서 스펙을 올리고 새로운 직장을 찾으라는 현실적인 조언이 난무한다. 하도 많은 글들을 읽어서 직장인이 꿈꾸던 백수에 대한 선입견이 생겼을 것이다. 지옥에서 살아가던 직장인이라면 특히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매번 인터넷의 세계여행을 동경하며 나는 언제나 나가보려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직장을 박차고 나가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든다는 풋풋한 청년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돈이 전부는 아닌데’ 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땡처리 항공권을 매일 들여다 보지만 휴가의 벽에 걸려 다른 이들보다 몇 배나 비싼 항공권을 사는 호구가 될 때마다 언제든 주저없이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에 목말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수가 된다는 것은 상실을 의미한다.


내가 매일 가던 출근길을 더이상 가지 않는 것, 아침 일찍 일어나 6시 50분에 합정역 세번째 칸에 올라타지 않는 것이다.
낯익은 얼굴의 바리스타가 내가 언제나 먹는 벤티 샷추가 라떼를 주던 정겨운 이벤트가 사라지는 것이다. (심지어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빌려주셨다. 퇴사 후 찾아갔더니 한동안 나를 궁금해 했단다.)
지겹던 출근 도장을 더이상 찍을 일이 없는 것이다.
습관처럼 정리하던 500기가 이상의 엄청난 라이브러리를 더이상 추가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업계 동향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내 맘대로, 중구난방으로)
매번 프로젝트를 같이 하진 않았지만 몇 년동안 낯익었던 이들과 더이상 같은 소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함도, 자리 전화번호도 내가 소유한 것만 같았던 책상, 컴퓨터를 더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장에 몇 백원하는 흑백출력도, 몇 천원하는 칼라출력도 이제는 출력기를 사거나 출력소에 가야 하는 것이다.
수없이 반복했던 잡무를 더이상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일을 맡게 되서 기뻤던 그 시간들이 진짜 추억이 되는 것이다.
재수없고 싸가지 없었던 후배들이 이제 나보다 더 오래 회사를 다닐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재수없고 더러운 선배들이 오랫동안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정년 퇴직까지 놀던 대로 놀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시 퇴근을 위해 미친듯이 집중할 일이 없을 거란 얘기다.
공동의 적을 위해 커피마시며, 담배피며 서로를 위로하던 동기들과 이제는 같은 얘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퇴근 길에 컴퓨터 전원버튼을 누르고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내지는 먼저 일어선 동료들에게 ‘들어가세요.’ 말하며 웃을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끌려가듯 가더라도 회사돈을 가장한 내 월급의 일부인 경비로 최대한 많이 먹겠다며 비싼 고깃집, 일식집에 갈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술먹고 주정하는 선배를 버리지 못해 새벽까지 잡혀있을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술먹고 주정하는 나를 지켜주는 이와 더이상 만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늦은 밤, 회식이든 철야든 모든 일과를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흥얼거리며 듣던 노래를 이제는 추억으로 만나는 것이다.
역시 우리 집이 최고라며 안락한 침대에 몸을 뉘일 때의 노곤함이 당분간은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지옥같은 회사에서 살아나왔다.

그러나 백수는, 퇴사는, 지옥에서 살아왔던 나의 처절한 인생의 한부분을 고이 접어 날려보내는 과정이다.

그러니 천국일리가 없다. 나쁜 연인과 헤어져도 눈물은 나는 법이니까. 다시 그 이와 만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가끔 생각나는 법이니까.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다 늙어 겪는 성장통은 더 아프고 슬픈 법이다. 나이가 들수록 회복력도 느려지니까. 백수천국이 되려면 적어도 지난 날과 아름답게 이별하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ps. 백수의 제일 최악의 순간은 그 지옥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순간이다.

딱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from http://unsplash.com


매거진의 이전글 저 세금 많이 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