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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Jun 08. 2018

모스크바가 눈앞이다.

당신이란 행복이 내게로 왔다.

헬멧에 눌려 떡이 져버린 머리가 바람결에 날린다. 모스크바까지 남은 거리는 280km.


체복사리에서 하루만 더 머물고 싶었다.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이 멀고도 험했기에 나는 쉬는 날을 기다렸다. 기왕이면 예쁜 도시, 아무도 가보지 않았다는 작은 도시를 만나 무턱대로 하루를 머물고 싶었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우연한 만남에 들뜨기도 하고 러시아의 척박한 도시에 지쳐있다 만난 예쁜 도시에 가슴이 뛰었지만,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달리고 달려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들은 비행기 타고 쉽게 가는 모스크바를 바이크로 매일 달려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하루더 소진한다고 별 거 아닌 것처럼 생각되지만 지금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경계선, 유럽과의 국경이 가까운 모스크바에 가고 싶다. 이르추크츠에서 만났던 젊은 친구들이 바이크를 부치고 횡단 열차를 탔던 이유와 비슷하다. 여행도 지치는 법, 길위를 달리는 것도 목표가 있기에 가능하다. 너무나도 긴 대륙, 끝이 없는 길에서 뭔가 점 하나를 찍어서 목표로 삼는다면 그건 모스크바이다. 그 점 하나를 가기 위해 삼주째이다. 달리다 보면 하나같이 달라 보이던 풍경들마저 지루해지고 한국에선 보기 힘든 새파란 하늘이 일상이 된다. 문득 지루함이 밀려들며 기다림에 지쳐버렸다.


그런 우리에게 드디어 오늘이 온 것이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날.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기에 그 지루함마저도 또 하나의 경험이지만 점 하나를 눈 앞에 두고 하루를 써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점검을 받아야 한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무조건 5시 전에 가져다 놓아야 주말 동안 점검을 마치고 월요일에 출발할 수 있다. 다음주면 유럽이 시작된다.


그 벅참, 내가 달려온 거리를 매 시간 확인한다. 만 킬로를 훌쩍 넘은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에게 감동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도 영화로 찍으면 천만 쯤은 거뜬할 것이라 자부한다.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그와 결혼까지 이르는 과정 덕분에 지혜와 인내심을 얻었다. 그동안 겪었던 그 모든 것을 돌이켜봐도 이번 여행에 비하면 옛날이 참 가소롭게 느껴진다.


아침 해를 보기도 전에, 조식이 시작조차 되지 않은 시간에 출발했는데 어느새 점심이다. 간밤에 내린 비가 만든 물 웅덩이를 가볍게 치며 시작한 덕분에 아직도 우비를 입은채이다. 한가득 흙탕물이 튀어있다. 촉촉한 우비가 바람결에 마르고 어느새 해가 뜬다. 하늘이 파랗게 맑은 게 마음에 든다. 드디어 러시아의 끝이 보인다.


휴게소에 들러 기름을 넣고 빵을 사 먹는다. 아침에 싸온 커피 한가득이 고맙다. 이제는 커피가 구비된 편의점을 만나는 게 보통의 일상이다. 초반의 러시아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기분이 좋은 탓에 나는 구름을 나는 것처럼 바이크를 탄다. 길이 좋다. 새로 깐 길이다. 18년의 큰 행사 덕분이라는데, 내년에는 이 길이 얼마나 많은 차들이 지나갈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누가 찾아오기나 할까. 여길 뭐하러 올까.  예전의 나라면 이랬을 것이다.

러시아의 아름다움은 유라시아의 대륙의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럽다. 러시아!

그 수많은 순간들을 만끽하는 최고의 방법은 라이딩이다. 물론 그 자체의 즐거움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일찍 시작한 탓에 중간지점까지 가분하게 도착한다. 오후에 모스크바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그는 마음이 복잡한가 보다. 신나서 깡총대는 나와는 달리 계속 담배를 물고 시계를 쳐다본다. 오늘의 일정이 틀어질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십 대에 왔던 모스크바에 대한 기억이 더해져 걱정이 늘어난다. 복잡하고 무질서했던 도로 상황이 그대로일 것 같아 계속 내게 다짐을 받아낸다.


"모스크바 교통은 장난이 아니야. 그러니까 운전에 집중해서 잘 따라와야 해."

“응, 그럴게.”


싱글벙글 나는 걱정이 없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행복함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담배만 계속 피워댄다. 날도 좋고 아직까지 문제 하나 없이 왔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야 하는데 아무리 앞에서 깡총거려봐도 그의 맘은 내 맘 같지 않다. 그의 맘은 그의 것, 걱정을 걷어내고 왜 웃지 않냐고 투덜거리는 대신 계속 그의 눈치만 살핀다. 둘이서 하는 여행은 이래서 좋다. 균형을 지키는 것, 여행의 기복을 잡아내는 것이 한결 쉽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그의 맘 덕분에 서둘러 출발이다.


두 번의 주유를 거치는 동안, 시간이 흐른다. 우리는 모스크바에 5시 전에 도착해야 한다. 우리를 기다리는 모스크바 두카티 직원들이 있다.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평온하고 아름답다. 걱정은 시내에 진입한 순간부터이다. 마지막 주유소가 아담하니 귀엽다. 시커멓게 타버린 마음에 그는 먹는 것도 귀찮은가 보다.

태양이 뜨겁다. 중간에 흐린 구름 지대를 지나오고 났더니 모스크바 인근의 하늘은 여름이다. 덥고 지친  내 앞에 에어컨이 빵빵한 주유소 안의 카페테리아가 유혹적이다. 그의 얼굴을 스윽 살핀다. 그는 약속에 민감하다. 우리가 늦어질수록 누군가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시계를 계속 확인한다. 금요일 오후, 제시간에 두카티 센터에 우리의 바이크들이 들어가지 못하면 주말을 그대로 허공에 날릴지도 모른다. 카페테리아를 사진에 남기고 바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바로 다시 출발이다.

얼음을 넣은 덕분에 커피가 시원하다,. 우비를 이제 벗어도 될 것 같다. 노란 우비를 벗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동을 건다.


다시 이 길을 돌아올 일이 인생에 있을까. 내 낭만을 찬찬히 삼킨다.  이제 진짜 끝같다.


지나간 길을 되돌아본다. 러시아, 시베리아, 말로만 듣던 그 기나긴 길. 내가 여기까지 왔다니, 신남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는 기쁨의 비명을 지른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균형을 찾는 것, 그의 무거움과 나의 생기발랄함이 겹쳐진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모스크바의 외곽도로의 실체를 만났다.


“씨발”

욕이 나온다. 차들이 엉켜있는 꼴이 말이 아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도로보다 크고 방대하다. 하나의 물결을 이루는 차들끼리 막힘없이 움직이는데 나는 그 흐름을 못 읽겠다. 아주 새차부터 아주 오래된 차까지, 지금까지 봤던 모든 차들이 한 곳에 있다.

“용이야, 정신 차리고 뒤로 붙어.”

오빠의 바이크 뒤통수로 바짝 붙여본다. 모스크바의 링을 실제로 만나보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들어오는 차와 나가는 차들 사이에서 중간 차선을 유지하고 한참을 달린다.  두카티는 왼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 링으로 진입하는 것보다 제대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잘못 나갔다는 한참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드디어 나가야 하는 길이 나타났다. 오빠의 꼬리표처럼 달리다가 끼어들 순간을 놓쳤다. 블루투스를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긴장 바짝이다. 그럴수록 나는 대범해진다.

“오빠, 걱정 마. 따라갈 수 있어.”

‘그래, 여기까지 온 나인데 요정도 쯤이야.’ 간신히 오빠 뒤로 다시 바짝 붙는다. 그리고 엄청난 양방향 12 차선의 거대한 링을 드디어 빠져나온다. 다행히 두카티센터는 링과 바짝 붙어있다. 나오자마 익숙한 로고가 눈앞에 펼쳐진다.



드디어 도착이다.

4시 53분. 다섯 시 전이다.

그가 드디어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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