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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의 소리

바다와 가까운 시골의 장점.

by NanA

17년 늦여름부터 25년 초여름까지 서귀포 안에서 네 번의 이사를 했다.

새로운 집을 맞이할 때, 이사의 번거로움보다 매일의 일상의 변화에 즐거움이 컸다. 집을 산다는 건 되돌리기 힘든 결정이라는 걸 매번 느꼈다.


저층이지만 해가 잘 들어왔던 첫 번째 집은 앞동사이로 바다가 빼꼼히 보이며 서쪽의 노을을 멀리서나마 감상할 수 있었다.

그땐 서귀포의 넓은 앞바다를 몰랐다. 먼 풍경이었다.

고층의 두 번째 집에서는 섬이 보였다. 여전히 먼 풍경이었지만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풍경을 넓게 볼 수 있었다.

세 번째 집은 대로변에 면한 적당한 층의 아파트였고, 바다를 앞에 둔 풍경 하나만으로도 배가 부른 곳이었다. 풍경이 일상이 되자, 도로의 소음도 일상이 되었다.

내가 소음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지금 살고 있는 네 번째 집에 살고 보니 시골과 도시의 차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장면 하나가 아니라 고요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서귀포의 진가를 도시의 소음을 느낀 후에야 알게 되었다. 만약 세 번째 집의 엄청난 풍광과 함께 딸려온 육 차선 도로의 소음이 없었다면 모른 채 지나갔을 것이다.


서울에 살 때는 몰랐다. 지하철, 도로,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끓이지 않았던 도시에서는 항상 기본적인 소음이 있었다. 조용한 사무실도 누군가의 대화가 있었고, 출퇴근길에 일상 소음은 이어폰의 음악으로 덮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후에서도 빵빵거리는 소리, 누군가가 병을 깨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도시의 술기운이 옅어지고 새벽이 찾아오기 직전에서야 고요했는데, 그 시간엔 나 역시 잠들어있었다.

서귀포는 관광도시라고 하지만 시골의 범주에 속한다. 지방인 것도 맞고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맞다. 일반적인 지방의 시골, 인구 소멸 직전의 농촌과 다른 관광이 주요 산업인 시골인 탓에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일 뿐이다. 부모님이 살고 계신 정읍의 어느 시골과 닮아 있는 서귀포의 소리를 맞닦드리고 나서야 여기도 시골임을 깨달았다.


이사를 할 때마다 먼바다와 하늘의 변화가 첫인상이라면 가장 강하게 남는 오감은 소리이다.

도시의 소리가 소음으로 쌓인 오케스트라 같다면 시골의 소리는 솔로이다. 배달 오토바이 소리는 관악기의 방귀 뀌는 소리이고, 어르신들의 두런거리는 대화소리는 가끔은 일렉 기타 같기도 하고, 캐스터네츠의 깡깡거리는 소리같기도 하다. 빌라로 접근하는 유치원 차량에서 하원하는 소리, 새벽에 쓰레기차 움직이는 소리가 선명하다. 각각의 소리는 고요한 가운데 불쑥 나타나 홀연히 사라진다.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소리에 하루의 시간을 가늠한다. 동틀 때가 되었구나. 출근할 때, 퇴근할 때가 되었구나. 뭐 이런 것들 말이다.


올봄에 서울에서 이틀을 보냈다. 오랜만에 홍대 앞 호텔에서 묵었다. 내가 살던 때,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던 기찻길 산책로는 연희동에서 공덕까지 끓기지 않고 이어져 무성한 풀과 건강한 나무들이 이어져 있었다. 비가 살포시 내려 산책하기 좋았다. 서귀포 마을의 산책로만큼 훌륭한 긴 공원을 걷는데, 길하 나를 건널 때마다 혹은 하나의 블록이 끝나 골목길이 사방으로 열릴 때마다 빗소리가 무색하게 도시의 소음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른 아침의 산책과 함께하는 도시의 소리는 작은 연주회 같았다. 그럼에도 달갑지 않은 건 이미 나는 산책의 소리가 새와 바람뿐인 시골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 마포구의 소음에 머리가 아파질 무렵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돌아왔다. 서귀포 앞바다를 보며 아침을 맞이하며 시골의 공기라는 말속에 고요함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 시골의 소리에 적응돼버린 거다. 그래서 도시의 소리로 간주되는 도로, 지하철, 많은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소음이 된 거다.


한편으론,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드디어 벗어났구나. 이제 나는 중심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약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뒤로 물러나서 소소한 삶을 살자고 내려온 건데 그 소소한 삶에 적응해 버리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음과 열정, 그 화려함과 기회를 아쉬워하는 게 우습지만 솔직한 마음이다. 도시의 삶이 아른거릴 때가 있다. 만약, 내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상상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창문너머 들리는 새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먼바다를 바라본다.

서귀포 앞바다, 익숙해진 동네 풍경, 친구 하나 없이 오롯이 살아온 팔 년이라는 시간. 어쩌면 그 팔 년은 내 남은 오십 년을 위한 적응기였을지도.


생일에도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마감하나 가 걸려 있어 며칠 뒤에 쉬기로 했다. 서로의 생일을 그저 그런 하루쯤으로 보내는 우리 부부에게 그다지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옥탑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방충망을 걸어놨었는데 너무나 가까운 난간에 새 한 마리가 앉은 것이다. 혹여 날아갈까 싶어 키보드 치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내 생일이었다.

새가 노래를 불렀다. 아무 뜻 없는 일이었지만 특별하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생일이었지만, 어쨌든 생일이었다.


참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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