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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Mar 02. 2017

우연

어쩌다 보낸 메일이 가져온 면접

실업급여, 구직급여를 타는 기본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회사에서 나를 잘라주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일 년 동안의 고용보험의 기록과 하루 일정 시간 이상의 노동시간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직 상태에서 한 달에 두 번 구직의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 교육으로 한 번의 노력은 대체할 수 있으나 한번 정도는 꼭 이력서를 넣거나 면접을 보거나 혹은 인사 담당자를 만나 명함을 받는 수고스러움을 해야만 한다. 


당연히 언젠가는 일자리를 다시 찾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실업급여를 위한 수고스러운 구직을 하는 것도 진짜 일자리를 찾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 억지로 워크넷에 펼쳐진 수많은 문들을 두들기다 보면 어디에도 고품격, 고품질의 자리는 찾기 힘들고 웬만한 대기업,공기업의 공채는 언제나 그렇듯 문 앞에 고만고만한 우리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다. 이름은 낯설지만 어딘가 괜찮아 보여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두 가지씩은 꼭 비어있다. 홈페이지가 뭔가 사기의 스멜이 느껴지는 경우도 더러 있고, 회사명을 돌려보면 신문지상에서 들리는 풍문이 좋지 않은 곳도 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여기보다 더 나은 어딘가를 꿈꾸지만 알고 보면 내가 있는 이 자리도 누군가는 간절하게 원하는 그 자리이기도 하다. 결국 '나'라는 사람의 만족도로 일자리를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다녀본 적 없는 대학생의 젊은 친구들이야 연봉 좋고 회사 이름 유명하길 원하지만 나는 9년의 짭 밥이 있는 나름 전문직 고학력 여성 직장인 아니겠는가.  내 기준은 간단하다. 다녀봐야 안다는 것, 똥인지 된장인지 겉으로만 봐서 뭘 알겠는가. 사장이 직원 되기 직전까지는 천사 같다가도 계약서에 사인하고 뒤돌아서면 착취의 스멜을 풍기는 게 이 바닥인 것을 모르지도 않거니와, 나의 존경하는 교수님이라고 믿고 소개했다가 미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우연하게 누른 워크넷의 이력서 보내기라는 수고스러운 노력이 가져온 면접이 기대가 된다. 사실 이력서보내기를 누른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연봉이 내가 받던 것보다 높았다. 구직의 자리가 내가 있던 위치보다 살짝 높은 '부장'급이었다.  일의 종류는 기존의 나의 일과 똑같지 않지만 좀 더 계산기를 두들겨야 하는 본사직이었다. 본사의 인원이 15명 남짓인 건 또 다른 반전. 결국 현장이 아니라는 말 정도로 해석해야 한다. 연봉도 좋고 일도 험하지 않을 것 같았던 것보다 더 큰 이유는 나를 뽑을 것 같지 않아서 였다 아직 내겐 휴식이 필요했고 계획해놓은 수많은 일들은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한 게 대다수였다. 내겐 구직급여를 탈 수 있는 노력이 필요했을 뿐 면접은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 없는 회사라 생각했다. 그런데 덜컥 전화가 왔다. 


당장, 내일 면접 가능하신가요. 

아...... 제가 공고가 3월 2일 까지라 그때까지는 일이 꽉 잡혀있어서...... (사실 놀랐다. 일정이 실제로 있었지만 거절하기도 애매했고.)

그럼 사장님께 여쭤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이틀 후 연락이 왔다. 


그럼 3월 2일에는 되신다는 거죠? 2일 11시에 본사로 오세요. 문자 넣어드리겠습니다.

네. 혹시 제가 가지고 가야 하는 서류라든가, 준비물은 없나요?

아...... 없는데요.


문자는 오지 않았다. 이럴 때 느껴지는 것은 이 회사의 짜임새이다. 사장의 전적인 의사결정권 아래 전화를 주신 이 분은 서무 여직원 급의 사원 정도일 것 같고 분명 연봉도 높고 직급도 부장이니 만져야 하는 돈의 규모나 관리 대상이 조그마한 동네 구멍가게보다는 크지만 조직화가 덜 된 것이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회사일 수록 사장의 친구, 후배, 인맥 등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대부분 40대가 이력서를 넣은 가운데 30대의 여성인 내게 면접을 보자고 한다는 건 둘 중의 하나이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거나 가장 어린 녀석 하나 잡아서 똘똘하게 키워보고자 하거나. 


갖가지 시나리오를 써가며 이 회사의 뒷배경을 캐내 보다가 문득 나의 기준이 떠올랐다. 아무리 튼튼하고 멋져 보인 회사도 들어가 보면 별 괴상한 사람과 희귀한 문화들로 가득 차 있지 않던가. 결국 회사는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과 부딪혀 보기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적은 구성원일수록 한 명의 여파가 전체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혹시라도!! 만일에!! 내가 들어가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적절한 규모의 회사이면 지금의 나에게 인생을 건 모험 대신 30대 중반을 건 모험 정도는 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되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력서에 지난 소박한 나의 역사를 적어본다. 퇴직하고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꺼라며 바로 사놓은 복합기가 빛을 발휘하고 지난해 회사 복지카드로 사놓은 사진 출력기가 어설픈 증명사진을 뽑아준다. 예전 같았으면 갖가지 사이트를 뒤져가며 좀 더 선명하고 자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었겠지만 내 맘에 드는 프로젝트 몇 개 적어놓고 판에 박힌 문장들을 나열한다. 새로운 직장을 만난다는 것은 첫 직장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회사의 인사팀이 몇 백장의 이력서에서 나 하나 골라낸 것이 우연이고 행운이듯 이리되어도 저리 되어도 만날 사람이면 만나질 테고 면접에서 볼 수 있는 사무실 분위기만으로도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이렇게 우연으로 만나서 서로에게 행운이 될 수 있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뭐 잘 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세상에 다양한 회사와 사람들이 존재함을 깨닫는 경험 정도로 그쳐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한 번의 노력을 한 셈이니 그것도 좋다. 


오늘도 블라인드의 업계 톡에선 대부분이 탈출을 얘기한다. 님이 있는 그 자리를 박차고 갈려면 당연히 이직을 하고 가시라는 진심 어린 조언과 이직의 힘겨움과 업종변경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그 끝도 없는 갈등은 어느 직장에서도 나오는 얘기라서 답답하다.  탈출한다고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나 하는 얘기이고, 탈출하면 또 다른 탈출을 갈구하게 만드는 새로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기왕 노력해서 새롭게 만나는 지옥이라면 예전과 다른 곳이길 바란다. 적어도 사회적으로 양심 있는 사람들이 나쁜 짓 안 하면서 돈 버는 도덕적인 기업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도 미친놈 절대 불변의 법칙은 존재할 것이고 내 맘에 드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고 날 맘에 들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겠지만, 적어도 상식선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정도는 되겠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도덕적으로 돈 버는 회사.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9년 만의 면접이다. 백수 생활 최대의 이벤트가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있는 힘껏 손을 든다. 나를 알아봐주지 않아도. 어차피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도 손을 번쩍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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