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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Jun 12. 2017

도시의 재발견

라이더만이 볼 수 있다.

거대한 도시 사이로 시커먼 도로에 차들이 항상 가득 들어차 있다.

 

평범한 저녁 7시, 길에는 퇴근하는 사람들, 약속에 늦어 뛰는 사람들로 바쁘다. 그 사이에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차 안의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짐작 가능하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면 반짝이는 별보다 빌딩들이 빛난다. 내게 늦은 시간의 도시의 풍경은 그저 그렇다.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내일을 기약하기 위한 조용한 침묵이 없이 바쁘기만 한 밤. 그저 하루를 뱅글뱅글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오면 여전히 북적이는 서울.


가장 북적이는 사대문 안, 명동 바깥쪽의 큰 대로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팔 차선의 도로가 있다.


그 넓은 도로를 버스 안에서 바라볼 때마다 한결같다. 매번 바쁘고 혼란스럽고 번쩍이는 서울, 처음 상경한 후 울렁증이 일었던 때와는 달리 복잡한 풍경이 서울생활 십 년이 넘어서니 익숙해졌다. 한 번은 불 꺼진 도시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칠흑 같은 어두운 하늘이 드리워져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까만 서울, 그 때 내가 상상한 것은 단순한 불빛이 꺼진 도시는 아니였다.  침묵하는 도시를 상상했더랬다.


그 날은 상경한 이래, 아니 성인이 된 이래 처음으로 참여해본 시위가 있었던 늦은 가을날이었다. 노란 은행잎과 열매가 아스팔트 위로 짓이겨진 게 마치 내 마음의 일부인 것 같던 그 도로로 향했다. 차로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어차피 동네 가는 길에는 항상 함께 했던 스쿠터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 날엔 지금의 정권교체가 만들어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20만 명 정도였다. 점점 늘어났던 촛불집회를 떠올려보면 적은 숫자지만 그 당시만 해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대열에 나조차도 놀랐으니까.


명동과 광화문 사이의 길들로 사람들이 가득 차고 생각보다 길어진 행진 대열을 쫓아가며 명동을 크게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스쿠터를 주차했던 그 팔 차선의 도로로 다시 돌아왔다. 관광객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들이 관광한 것은 진짜 변화하는 한국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헤매고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 스쿠터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별이 내려와 반짝이는 서울


나는 처음으로 서울 도시 안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다. 갑갑하기만 빌딩 숲의 한가운데, 스쿠터에 앉아서 팔 차선의 중앙에 오도카니 멈춰 서자 별들이 내려앉은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버스에 앉아서 차에 앉아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엏다. 그 시간이 어서 지나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눈빛들이다. 그리고 나는 차들로 가득한 팔 차선의 한가운데 오롯이 두 다리로 아스팔트 위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 경험은 내가 건축을 한답시고 여행 다니고 공부했던 것이 얼마나 얕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까만 밤하늘이 천장이 되고 백화점이며 은행 건물이며 새로 지은 오피스들이 기둥이 된다. 차들이 마치 사람 같고 내 스쿠터가 나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별들이 내려앉는다. 서울의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가 야근하는 직장인들 덕분이라고 한단다. 그 야근하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시간들이 녹아들어가 이토록 웅장한 풍경을 만드는 구나. 감탄을 하며 처음 본 서울처럼 두 눈을 꿈벅이며 한참을 구경한다. 밀린 차들은 거북이처럼 느림보로 걸어가지만 그 느림이 하나도 화가 나지 않는다.


바이크에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것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알고 싶어 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경험한 것을 잊어버리면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바이크를 타기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그 경험의 인정이 가장 아쉽다. 처음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남자 친구가 바이크를 산다고 했을 때 나는 말리지 않았다. 그의 경험이 그를 행복하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감사한 일이니까. 주변에선 나에게 위험한 것을 말리지 않는다고 의아해했다. 충동적이고 불안정적인 고약한 취미생활을 용납하는 착해빠진(?) 여자 친구가 돼버렸다. 아마도 바이크를 사고 라이더가 되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의 즐거움과 행복이 느껴진 탓이었을 거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충고가 점점 쌓여가자 어느 순간부터 길 가다가 차에 치여 죽는 세상인데 바이크 타서 사고 나고 안 타서 오래 살지 않을 것 같다고 대차게 대답해 버렸다. 이 세상 사는 게 (지금 여기 한국, 30대 중반의 직장인, 당시엔 백수생활 시작 전이였으니까) 가장 위험한 것 같다고 말해버릴까 하다가 꾹 참았다. 여러분의 지랄 맞은 오지랖이 폭포처럼 쏟아질 때마다 그게 더 죽을 것 같다고 한마디를 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도 오지랖이 넓은 그들 중에 한 명인지라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라이더가 되어가는 과정에 서있다. 왜 그렇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표현하는지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가장 강렬했던 그 팔 차선의 서울의 밤 풍경은 그 날의 시위, 행진의 기억과 함께 좀 더 알아가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바라볼 때마다 한 번도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는 감동을 받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커진 도시가 지난날의 기록들을 집어삼켜 어느 하나도 예스러운 흔적이 사라진 길거리와 아름다운 한글이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간판들, 어쩌다 만난 조심스럽고 단아한 건축물조차도 시간이 지나 상점들이 들어앉아 볼썽사납게 균형을 잃어버리곤 하는 너무나 현대적인 서울. 누군가는 그 화려함에 홀리겠지만 그래서 금방 지쳐버려 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 서울이 바이크에 타서 달리는 주무대가 되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눈으로, 그러니까 두 다리로 걸어가서 담을 수 있는 풍경의 제약은 신체적인 제약도 있지만 인도라는 공간의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차와 버스도 마찬가지다. 비싼 깡통의 뚜껑 없는 공간은 다를 테지만 대부분의 자동차의 공간의 제약은 창문을 통한 프레임으로 도시를 만난다.


라이더는 도시를 날 것으로 만나는 행운을 만날 수 있다. 법적 속도를 지켜가며 혹은 꽉 막힌 차도에 오도카니 서 있으며 볼 수 있는 공간은 웅장하다. 양쪽으로 같은 비율로 차선과 인도가 균형을 맞추고 도시 계획에 따라 비슷한 높이로 올라간 건물들이 각각의 아름다움의 유무를 떠나서 색다른 공간감을 제공한다. 아마도 그 극적인 순간이 내가 팔 차선에서 보았던 백화점과 오피스들의 반짝이는 별들이었으리라.


단순히 보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느 골목에 가면 치킨이 튀겨지고 있는지 빌딩 사이로 골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차들의 매연이 매캐하게 뿜어져 나오며 우리의 도시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시간을 지켜야 하는 촉박함에 마구 밀어붙이며 차선으로 진입하는 버스기사님들의 애잔한 삶도 차마 바이크를 보지 못하고 정면만 바라봐야 하는 비싼 깡통 속의 김여사님도 만난다. 같은 라이더가 봐도 무시무시한 배달부들의 위험천만한 운전을 만날 때면 바짝 긴장하는 건 차나 바이크나 매한가지이다. 빌딩 속에 갇혀 매번 컴퓨터로 똑딱거리며 3D로 무한 상상력으로 건축설계를 할 줄만 알았지 진짜 삶이 이뤄지는 도시라는 공간을 나는 몰랐다.


서울이 이토록 거대하다는 말은 무섭도록 커다란 회색의 도시를 좋게 돌려서 하는 얘기였다. 그 회색 도시 안에 사육당하는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질 때쯤 잠깐 쉬어가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운명 같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라 느껴졌던 강남의 빌딩들은 건축설계를 하던 내 눈에 유행에 쫓아가느라 정체성 없는 싸구려 제품들로만 보였다. 어쩌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태생부터가 그럴지도 모를진대 나는 그 어쩔 수 없는 한계를 탓하기만 했다. 무조건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아름답진 않으니까. 그러나 분명 서울은 독특하다. 쏟아져 나오는 차들을 위한 팔 차선, 육 차선의 도로가 도시를 점령하고  번화가뿐만이 아니라 서울 어느 곳에서도 익숙한 편의점 간판과 갖가지 상점들의 간판들에 눈이 부시다. 작은 골목이 사라진 대부분의 서울 안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보다 더 우선수위인 차가 도로를 가득 매운 데다 어디를 봐도 하늘과 산이 아닌 아파트 벽이 보인다. 분명 사람이 살만한 규모를 모두 벗어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게 서울이다. 그 또한 특별한 어떤 것임을 인정하자 그 풍경만의 매력이 이제야 보인다.


작은 소음 하나가 도로 저 끝에서 들려온다. 그게 바이크인지 자동차인지 추측하며 시선을 돌리지만 결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도시의 도로에 서있으면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게 된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사지가 함께 움직인다.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의지가 본능이 되어 팔다리가  움직인다. 살아있음이 미치도록 강하게 인지된다. 스로틀은 손바닥 끝으로 지그시 눌러야 툭 튀어나가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감각으로 움직여야 하는 200kg의 기계 덩어리 위에 앉아 사방을 주시하며 날 것의 도시 안에 머물러 본다.


라이더만이 볼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가끔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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