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도에서 만난 아름다운 금수강산
드르럭, 드르럭. 엔진소리가 이를 맞추는 것 같다.
어디서 기어를 올렸더라. 지금 몇단이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질때 쯤 아무리 당겨도 속도가 제자리인듯 하다.
내가 얼마쯤으로 달리고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가고자 하는 길의 끝을 바라보며 시선과 머리, 어깨, 가슴을 맞춰본다. 팔을 가볍게 둥그랗게 벌려본다. 아랫배를 뒤로 최대한 밀어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종아리와 무릎을 걸쳐 바이크를 움겨쥔다. 먼 지점을 바라보는 터라 속도감각이 무뎌진 건지 아직은 무섭지 않다. 바람처럼 내가 날아가는 듯, 그러나 안정적이다. 다시 한번 덜컥, 기어를 올려본다. 5단이다. 촤락 덜덜, 뭔가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있다. 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처음 스크램블러를 받은 것은 3월 중순이였다. 강남 두카티 매장에서 녀석을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두꺼운 가죽잠바를 입었다. 바람이 세차게 몸을 때리는 느낌에 움츠러든 것은 몸과 마음, 둘 다였다. 무서움을 넘어서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넘어서야 할 산이 과제로 느껴지기보다는 녀석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 설레임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훈련이 시작되었다. 장거리 투어랍시고 속초 왕복, 춘천 왕복을 거쳤지만 아직은 첫 점검이 오지 않았다. 첫 1,000km 주행거리 돌파 시에는 상태 바에 점검을 하라는 신호가 뜬다. 결국 제주도 장거리 투어까지 마친 1,800km 주행 이 후에야 첫 점검을 받았다. 주행 거리가 늘어날 수록 마음은 가벼워졌고 점점 시선은 바로 코 앞이 아닌 내가 가야할 곳을 향하게 되었다. 사이드 미러를 통해 주변의 교통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자 한결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렇게 바이크를 타고 난 다음 날의 어깨통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몸으로 만끽해본다. 서울에서 바이크를 탄다는 것은 밀릴 때 갓길을 탈 수 있고 주차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만큼 차들로 가득찬 도로이기에 가끔은 바이크라서 훨씬 빠르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수도권을 벗어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차들보다 더 많은 바이크 떼를 만나는 경우도 있고, 네바퀴가 없는 곳에서 두바퀴가 시원하게 달리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알차를 타는 사람들은 날아가는 느낌일 수도 있다. (아직까지 그 정도 속도를 올려본 적은 없다.) 상상일뿐 나는 지나친 속도감을 경계한다.
지방의 국도들은 대부분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많이 이용했을 휴게소들이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 정비된 2차선의 고가부터 산 자락을 휘감아 돌아가는 완만한 경사로가 있는가 하면 나즈막한 산을 두동강 내고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도 있다. 서울에 살다보면 가끔 운이 좋은 맑은 날,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지만 지방으로 조금만 나가보면 온통이 산이다. 특히, 강원도를 향할 때면 짙은 초록의 산 뒤로 점점 연해지다 회색빛의 그림자처럼 느껴지는 먼 곳의 산맥까지 볼 수 있다. 그저 차안에서 보는 프레임에 갇힌 사진이 아니라 내 눈안에 풍경이 가득 담긴다. 집에서 모니터로 보는 영화와 영화관에서 4D로 보는 것의 차이랄까.
우리나라의 진짜 풍경은 오직 달릴 때만 느낄 수 있다. 손끝과 발끝의 예민한 감각이 살아서 어디로 향하는지 얼마나 달려야 할지를 조정한다. 천지를 울리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을 때면 내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조금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자세를 바로 잡아본다. 다시 한번 바람을 가르고 앞으로 쏟아져본다.
총 3,650 km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달린 우리나라의 도로이다.
많은 라이더들은 한해에 10,000km를 넘기는 거리를 달린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집 밖으로 끌어내 한번 더 두 바퀴에 올라타게 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 100선을 찾아보면 된다. 무작정 달리다 보면 우연히 만나는 그 곳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서쪽을 향해 달리다 만나는 노을, 교통체증에 옴싹달짝 못하며 멈춰선 순간에 만난 은빛 한강 위로 내려앉은 서울의 밤과 휘영청 달,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는 본 사람만이 기억으로 만날 수 있는 다시 없을 순간들이다. 오늘 나가면 다시 또 어떤 장면을 만날게 될까. 그렇게 설레임에 시동을 켠다.
내가 달린 한국의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스크룡과 달리게 되었다. 한국만큼 아름답고 광할한 대지를 만나게 될테지만 단연코 돌아오는 한국의 국도가 최고일 것이라 자신한다.
바이크 위에 앉아 보면 내 몸이 종이 한장처럼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과 바이크를 믿고 신중하게 그리고 자신감있게 운전해야 한다. 가장 침묵하는 순간이 오면 오직 달린다는 느낌으로 가득차 더이상의 감정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낯선 곳에서의 라이딩은 나를 다시 초보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도전한다.
2017년 7월 3일 블라디보스톡을 시작으로 2달간의 긴 여정을 결심하게 만든건 3,650km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국도 때문이다. 이토록 멋진 경험이라면 몇달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레임과 즐거움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물론 인내심을 가지고 이끌어준 짝꿍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바람을 가르며 세계를 돌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