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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Jun 23. 2017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뿐,

남의 꺼 먹으면 탈 나기 십상, 내 입맛엔 내 떡이지.

불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최고의 업계는 내가 머물던 그곳.

누가 나를 인정해줄까. 지금 와서 새로운 곳에 도전한다면.

다시 비슷한 직장을 찾아 돌아가야 할까?

만일이라는 단어로 과거를 돌려본다.
그랬다면 이라는 후회 섞인 혼잣말을 해본다.

전문직 직장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그저 35살, 흔하디 흔한 희망퇴직자로 새로운 곳을 탐방해 본 지 6개월을 넘어섰다. 곧 실업급여가 끝이 난다. 비축해 놓은 통장의 잔고, 원 없이 쓸 거라고 따로 챙겨둔 금액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아껴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기에 아깝진 않지만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통장을 자꾸만 열어 보게 된다.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


꼭 예전과 비슷한 직장을 다시 다닐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질 생각이고 대학 등록금은 이미 본전은 뽑은 것 같은데 다른 즐거운 일을 찾아볼까? 생각한 대로 살아진다면 참 좋겠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포장하고 아름답게 보이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나 보다. 가게 사장님들은 걱정 없이 아르바이트생 부리며 자동으로 직장인보다 많은 월급을 벌 것 같았고, 꽃집 아가씨는 매일 아름다운 꽃들로 인해 그저 맑고 티 없는 삶을 살 것만 같았다. 요가 선생님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인생살이가 지혜로울 줄 알았다. 그들은 모두 비정규직에 오락가락하는 인성의 불특정 다수에게 시달리며 격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지나치게 지쳤었나? 내가 희망퇴직을 결심했던 이유가 뭔지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리저리 굴려봐도 그 전의 연봉을 받으려면 다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마저도 요원한 지금이다. 다시 돌아갈래! 크게 외쳐봐야 하나? 아마도 많은 백수들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마음으로 암담한 현실에 맞닦드릴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섰던 그 날을 되새길 것이다. 내게 다시 묻는다면?


그래도 나는 희망퇴직을 할 거다.  

고민 많고 어설프고 생각보다 두려운 백수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인생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없고 그랬다면 이라는 후회가 가장  쓸데없다. 지금 당장 여기의 나의 삶이 가장 중요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지금의 행복을 좌지우지한다. 무엇을 경험했고 느낄 수 있는지가 하루 지나면 달라진다. 나는 매일 성장하고 그 자라남을 느낀다. 어떤 변화가 있고 그래서 예전과 지금 중 무엇이 더 낫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예전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되었고, 직장인이었기에 백수인 지금이 특별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어느 특정한 시기를 딱 골라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제나 나름대로의 규칙으로 살아온 시간들이기에 거꾸로 돌려 지금과 다른 내가 되고 싶지 않다. 그 나름의 소중한 시간들을 다시 되새김질 하기엔 길고 긴 지금의 백수의 시간이 딱이다.


의외로 내게 물어보는 이들이 많다. 지금 어떻냐고, 선택의 기로에 서서 무엇이 더 나은 인생인지를 물어본다. 내가 선택한 지금을 부정하기엔 만족도가 너무 높기에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남의 인생의 큰 결정을 내가 감 놔라, 배 놔라 하기가 어렵다. 그만두고 쉬라는 말을 저 아래에 깔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본다. 주저리주저리 어떤 것은 두렵지만 이런 것은 너어무 좋다고 강약을 두어 이야기해본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지금 이 사람은 내 떡을 자신의 떡보다 더 크게 보고 있다고, 그렇지만 내 떡이 그 이의 입맛에 맞지 않을 거라고.


'인생학교'라는 단어를 최근에 많이 들었다. 학문이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인생 사는 법을 다 큰 성인들이 배운다는 이상한 개념. 누군가에겐 희망적인 단어처럼 들리겠지만 나에겐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단어처럼 들린다. 인생을 배워서 정답처럼 살아가고 싶은 강박관념이 빚어낸 우리 사회의 이상한 조합이다. 넘어지고 다치고 슬퍼해야 기쁜 날도 돌아오고 치료할 줄 알고 다시 일어서는 법. 초, 중, 고등학교에서 일등 해서 명문대로 들어가 소위 잘 나가는 성공한 이에 들어가야 행복한 게 아니란 것은 이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럼에도 인생의 바르고 좋은 길만 가고자 하는 욕심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배운다고 그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모든 상식이 그대로 지켜지지 않듯이.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본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업계는 하나같이 열악하다. 대한민국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말고, 그래도 어느 정도 전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야에서 우리의 노동력의 가치는 너무나 싸다. 커피 한잔에도 손이 덜덜 떨리는 시간당 임금도 문제지만 노동력 그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더 나쁘다.


그래도


내가 다른 이름으로 세상에 한 발 내딛는다면 9년 전 처음 직장인이 되었을 때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좀 더 영악해져서 다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그토록 지겨웠고 월급 이상의 의미 외에는 찾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직장인의 하루보다 더 흥미진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9년의 시간 동안 내게 쩌들어 있던 나름의 엘리트 의식과 내가 머물고 있던 대기업 문화의 무의적인 갑질과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세속적인 고정관념이 무너졌다.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직업이 있고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돈과 성공의 노예가 되어 더 많이 더 높이 날고자 하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대느라 몰랐던 것일 뿐.


내겐 남의 떡이 커 보였던 시간이 바로 그때였다. 어느 시점부터는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었지만 행복하지 않아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않다고 느껴서 다른 이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요가를 배워서 선생님이 되면 하루의 시작이 언제나 평화로울 거란 기대를 품었다. 하루의 시작이 덜컹거리는 지하철을 지나 모니터 앞에 앉는 것이었기에.  꽃을 보고 만지면 소녀 감성으로 돌아가 티 없이 맑고 순수해질 거라 기대했다. 매일 악다구니를 써가며 상사, 후배, 발주처, 협력업체와 씨름해야 했기에.


고작 9년밖에 일하지 않았다.

무려 9년이나 일했다.


그 어감의 차이에 따라 지금 내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내게 가끔  고작 으로 생각되어지는, 그렇지만 거희 항상 무려 라고 여기고 있는 지난 직장인의 시간이 있었기에 백수생활에 만족한다. 오히려 더 짧게 일했다면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정해진 길이 있어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꼭 근속연수를 길게 채우는 것만은 아니다. 그 누구도 내 인생에 옳고 그름을 말해주지 못한다. 나조차도 그 판단은 죽기 직전에나 가능할 것 같다. 때로는 지독히 나쁘게 살아보는 것도 그 까만 어둠을 겪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포스가 부럽기도 한 것처럼, 인생의 색깔은 저마다의 독특함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러니까 직장인들아. 이제 갓 실장, 과장, 팀장 기타 등등을 단 희망퇴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어느 대기업의 10년 차 직장인 친구들아. 각자의 인생을 잘 살아보자. 나처럼 과감히 때려치우는 게 정답인 사람도 있지만 꾸준히 오래도록 매일같이 출근하며 언젠가는 제대로 된 임원이 될 수 있는 상식 있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


어쩌면 나에게도 지금의 이 시간이 약간의 방향 전환에 불과할 수도 있다. 다시 업계 언저리로 돌아가 쳇바퀴를 돌릴지도.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내 떡은 참으로 내 입맛에 맞다. 배탈 난 배를 움켜쥐고 남의 떡을 삼키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몇몇 이들도 언젠가는 체질이 바뀔지도 모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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