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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Jun 27. 2017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고.

이제서야 진짜 백수 시작.

한 달에 한 번, 숙제처럼 느껴졌던 실업 급여 신청이 어제로 끝이 났다. 이렇게 6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희망퇴직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재취업의 결심이 서기도 전에 혹시나 싶어 워크넷에 열심히 메일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 역시나 안되는 구나 싶어 일부러 연봉 높은 곳을 찌르기도 했고, 정말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자소서를 써내려 갔던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경력직의 자소서를 써내려가려했지만 차마 거짓말을 못하겠더라.  그렇게 솔직한 탓이였는지 (내 장점을 삶과 일의 균형이라고 썼다. 9년전에는 회사와 함께 살아가겠다 썼다.) 연락오는 곳은 한군데였다.


하루 4만 3천원 남짓의 일당을 받았다.  그렇게 한달을 보내면 백이십만원 남짓을 받는다. 희망퇴직을 할 때 총 얼마 받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회사에서 주는 위로금에 교육지원금, 9년남짓 일한 나의 퇴직금, 미처 정산하지 못한 보너스며 이리저리 합산의 끝에 다들 실업급여 6개월치를 더하곤 했다. 막상 받아보니 이건 회사를 퇴직했다고 준다기보다는 내가 지난날 납부했던 보험금에서 나오는 내 권리더라. 이걸 퇴직하며 받는 플러스 알파로 생각했던 건 실수였다.


내일배움카드를 통해 재취업 혹은 창업을 위한 학원을 다니며 나와 비슷하게 퇴직을 선택하신 분을 만나면 실업급여가 주는 뭔지모를 위안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아직 내겐 몇 달이 남았다며 웃음짓곤 했는데. 드디어 끝이 났다. 더이상 워크넷을 쳐다보며 혹시라도 답이 온다면 좋겠네 싶은 일도 없을 것이고 날짜를 기다리며 한달에 한번 우리집의 윈도우가 켜지는 일도 없겠다. 시원섭섭하다. 이제 진짜 백수가 되었구나.


같은 백수임에도 실업 급여를 부러워하는 이들도 만났다. 그들의 섭섭한 눈빛을 보고 이야기하다보니 자진퇴사를 하는 이들을 실업급여에서 왜 제외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대부분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표를 던진다. 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놀기 위해 그만두는 이는 몇명밖에 보지 못했다. 모두에게 제공된다면 다들 일년만 일하고 쉬면서 실업급여를 축낼 것이라는 짐작 때문일 것 같은데, 과연 12년의 정규교육과 그 후 몇년의 전문교육을 받은 성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만둘까?  고작 6개월의 실업급여 때문에? 반대로 실업급여 받겠다고 쉬는 인력들이 그 회사에서 제대로 일하고 있기나 했을까? 회사에서는 마치 선심쓰듯이 잉여인력, 부진인력 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들에게 월급이라는 것을 주고 있는 것이 사회를 위한 공헌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 물론 그 평가의 기준을 회사 멋대로 만들고 평가자 또한 회사에 고용된 누군가라는 것임을 감안하면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평생의 반려자라 믿고 들어선 결혼의 길에도 험난한 가시밭길이 있는데 한 직장에 자신의 의지로 기쁘게 만족하며 다닌다는게 쉬운 일일까?  비전이 없는 회사라 여기면서도 꼬박 꼬박 들어오는 월급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할지도 모르는 희망퇴직의 위로금 때문에 습관처럼 회사에 가서 버티는 시간을 보내는 직장인들에게 어쩌다 실직을 하게 되더라도 실업급여는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실업급여 받겠다고 처음 고용센터를 찾았을 때, 어르신들이 생각보다 많음에 놀랐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엄마뻘 되시는 분들이 내미는 명함을 보고 그래도 4대 보험 들어주는 자영업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많이 감사했다. 나도 언젠가는 일용직 노동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노동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전문직 여성으로서 한때는 업계 연봉 최고의 직장에 일했다는 자부심과 마음 한켠의 우월감이 내게도 자리잡고 있었고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그 자신감은 회사 밖에 나와보니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저 경력단절을 겪는 30대 중반의 여성, 같은 조건의 남자에게 혹은 후배, 선배에게 밀릴 수 밖에 없는 사각지대에 나는 놓여있다.


그래서일까.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 나의 능력을 돈으로 환산했을 때 내 기준이 지난 직장의 연봉에 머무르자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뭔가 이건 아닌 건 같다고 박차고 나왔지만 내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연봉으로는 옮겨갈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내려놓는 시간이 실업급여를 받는 6개월이였다. 누가 나를 고용해줄까. 그 고용주는 지난 내 직장의 고용주보다 나을까. 야근과 철야없이 아이를 가지고 또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나의 커리어에 대한 생각들, 분명 그게 내 미래의 전부가 아닐진데  생각에 따라 흔들거리는 불안감과 추락하는 자신감에 매우 맘 졸였다. 가끔 만나는 직장동료 그 이상 가까원던 지인들과 웃으며 편하게 회사 얘기를 하지 못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였다. 내가 박차고 나온 회사, 시궁창 같았다고 얘기하고 싶은 그 회사에는 아직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일하고 있다. 더 나아지라고 힘내라고 응원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어떻게 버티고 있냐고 물으며 위로하는 것은 나의 교만함이다. 각자 자신의 판단에 의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제 다른 길에 들어섰지만 나도 그들도 그리고 회사의 안위도 더 좋아지길 꿈꿔본다.  


이제 통장에 들어오는 돈 따위는 없다. 그동안 쌓아놓은 돈을 야금야금 갉아먹어야 한다.  그 불안감에 시간을 저당잡히면 안된다. 어쩌면 내가 오늘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되 현실에 사로잡히지 말 것.


사람들(여기에 나도 포함해서)은 이해한다라는 표현을 쓴다. 다름을 인정한다라는 말도 많이 한다. 막상 그 입장이 되기전까지 그 모든 이해와 인정은 노력에 불과하다. 그 노력을 하잖게 생각한다는게 아니고 그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직장인이였을 때 아무 대책없이 그만두는 이들을 부러움을 감추며 한심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막상 그만둘 때가 되자 아무 생각없이 그저 쓰게 되었다. 그렇게 백수가 매우 쉽게 되었다. 예상과 달리 과정은 매우 쉬웠다. 그리고 밝게 웃으며 9년 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떠났다. 남겨진 선배의 손인사가 아직도 또렷히 기억난다.  눈물짓던 후배의 뒷모습이 마음에 각인되었다.


이제서야 직장인의 비애가 오롯히 내 것이 되었다. 떠나보내기도 했고 이제는 떠나온 사람이 되었다. 깜깜한 앞날이 그래서 더 설레이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는게 절벽이 될까봐 조심스럽기도 하고 떨어지면 다시 올라오면 되겠지 싶기도 하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며 살아가는게 인생이라지만 굳이 내려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이 내리막인지 회사를 그만두기 전 몇 년이 내리막이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현재를 단정하고 결론내리고 싶어하는 것도 버려야겠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백수부부가 되기로 결심했던 계기 중에 하나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짝꿍의 꿈이였던 유라시아 횡단이다. 물론 계기에 되었을 뿐 가장 큰 요인은 9년 동안 직장인으로 살아온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막상 그 한계를 벗어나니 또다른 고민거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벗어나고 싶던 한계가 나를 보호하던 울타리였고 우물 안 개구리가 행복하면 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겠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나의 첫 직장, 마지막 실업급여마저 끝이 나니 이제 내게 연결되었던 그 모든 실이 끓겼다.


9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그 회사 안에서 보냈다. 지금 나를 만든 대부분의 것은 그 곳에서 배우고 익힌 것이다. 그 고마움을 담아 어쩌면 해체해야 당연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기업의 안위가 걱정된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이들은 어찌할꼬. 필요악이 되버린 기업을 때리는데 아무 죄없는 이들이 본인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멍들고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룡같은 대기업을 만들어 낸 건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지 일하는 이들이 아니다.


곧 여행을 떠난다. 마지막 실업급여와 따로 떼어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 마지막까지 내가 이 여행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인생에 다시오지 않을 기회가 왔다. 지금껏 내 손에 쥐어졌던 모든 것들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갔다. 다시 움켜쥐지 않으리, 그냥 흘러가듯이 가볍게 살아가리라 결심해본다.


희망퇴직, 그 그늘과 빛을 모두 보았다. 내게는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였다. 다만 원치않는 이에게는 빛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Born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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