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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Sep 02. 2017

백수가 그린 그림

세상의 모순을 외면하는 법.

해피엔딩이 당연한 드라마에서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성장한 주인공이 어느새 성장해서 사장이 되고 성공신화를 만든다. 패기 넘치는 젊음이 소진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양분이 되어 누가 봐도 훌륭한 사회 구성원으로 어린 후배를 이끌고 못된 선배에게 일침을 날린다. 못된 사람은 항상 마지막에 반성하고 개과천선하고 모든 사람이 적당히 만족하는 수준에서 끝이 난다. 


드라마는 현실에서도 펼쳐진다. 이야기는 더 무궁무진하지만 시작과 끝, 과정 모두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다. 나는 이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그러진 구조 탓을 했다. 어쩌다 어중간한 시기에 중간자로서 살아가는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힘없는 소시민이라 스스로를 믿어왔다. 인생에 누구나 열 개 이상의 드라마를 쓰듯이 내게도 열 개가 넘는 드라마가 써지고 끝이 난다. 그러나 그 열개의 드라마 중 한 두 개의 훈훈한 해피엔딩을 제외하고는 비극 내지는 B급 블랙 코미디 정도가 될까 말까이다.  


다행인 것은 가진 것이 점점 쌓여갈 때쯤  결혼을 통해 안정적인 자리가 잡혔다는 것이다. 불행인 것은 그 묘한 안정감을 균형을 맞추고자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백수라는 어중간한 상태. 직장인의 눈으로는 보아도 느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30대 중반의 백수가 되어 알아가고 있다. 백수의 가장 좋은 점은 뭐라도 할 수 있는 자유이다.  예의상 가지고 있는 불안함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내일이라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 도전의 이면에 숨어있는 위험요소를 너무나도 잘 알게 되면 다시 주저하게 된다.  


드라마의 갈등과 고난의 시작인 모두 외부적인 요인에서 온다. 결정적으로 나쁜 사람의 나쁜 선택이 쓰나미가 되어 주인공을 절망의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나는 하나의 잘못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이런 시련이 시작되었는지 구시렁대기 전에 성실한 주인공은 머리를 질끈 묶고 다시 도약한다. 


나의 백수의 시작은 결정적으로 일을 하기 싫다는 내부적인 요인에서 왔다. 백수로 접어든 지 열 달이 넘어간다. 회사의 주인의 비도덕성, 상사의 모자람과 사람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을 탓하기 전에 나는 9년의 회사생활에 질려있었다. 성공을 해봤자 이 바닥이고 지지고 볶아 무언가를 성취해냈다고 한들 그 성과의 0.001%도 안 되는 보상에 억울했다. 내 목소리를 낼 정도의 직급과 칼퇴를 할 정도의 능력이 결정적으로 희망퇴직을 만들었다. 


희망퇴직을 선택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고민의 종류가 달라졌다. 십 개월의 휴식 동안 재취업을 향한 다양한 새로운 탐험도 해보았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중이며 최근에는 긴 여행도 다녀왔다. 길다면 긴 그 시간을 소비하는 동안 분명 새로운 자극이 있었을 텐데 도무지 아직도 취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나 새로운 사업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열 달 동안 회사를 다니며 고민했을 많은 것들은 사실 대상과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은 백수라는 지금의 위치를 거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을 것들이다.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걸어나오는 것, 퇴장을 아름답게 그리고 멋지게 포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에 딱 맞는 희망퇴직은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백수가 되어 새로운 탐험을 시작하며 나의 이기심과 후회도 늘어갔다. 세상에 대기업만큼 편한 곳이 어딨으며 나의 역량에 보답하는 적정 수준의 봉급을 중소기업에서 주지 않는다. 무엇이든 내가 하는 일에 맞는 보상이 없다면 도전하지 않겠다는 뻣뻣한 자세가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만일 내가 사장이 되는 큰 꿈을 꾼다 치자. 그렇다면 그렇게 싫었던 적당한 보수를 내가 아닌 직원들에게 먼저 줄 수 있을까. 품질이 좋은 무엇인가에 나의 노동력이 더해진 무엇인가를 제공할 때 나는 서비스업이라는 글자 아래 몸을 숙일 수 있을까. 몸과 마음이 편하게 돈 벌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면서도 막상 내가 누군가에게 몸과 마음이 편한 무엇인가를 만들 용기는 가지지 못하고 있다. 


실천, 행동, 변화, 말이 좋지 어쨌든 나의 노동력과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을 바쳐야 티끌 같은 자리 하나 마련할 수 있다. 대박을 꿈꾸지 않아도 생존이 걸린 무엇인가를 할 때, 나는 과연 정직할 수 있을까. 소시민을 위한 어떤 것도 소시민적이지 않다는 현실 앞에 내가 자선 사업하듯이 총대 메고 헤쳐나갈 열정이 사라졌다. 


내게 남은 열정이 있기에 안정적인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인데 그 계기가 너무 영리하고 현실적이어서인지 남은 쥐꼬리만큼의 열정을 그 어디에도 쏟고 싶지 않다. 소진해버린 후, 실패해버린 후에 다시 일어서면 되지 라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없어서도 아니다. (나는 매우 긍정적이고 명랑한 사람이다.) 어느 누가 생각해도 매우 우스운 이유이다. 아직 시작조차 안 했으면서 이미 성공한 듯 가장하고 상상하고 예상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내가 열심히만 성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건 비슷한 조건의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잘 되기 위해서 선택해야 하는 많은 것들은 거짓말과 위선이 보태져야 한다. 세상의 순리가 아직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큰 회사에서는 그 책임을 회사에 돌리고, 상사에 돌리고, 나는 힘이 없는 직장인이니까 라고 말하지만 밖을 나와서 보면 작은 회사도, 한낱 구멍가게에서도 다들 그렇게 치열한 삶이라는 이유로 눈을 질끈 감고 더 악랄하고 비겁하게 돌아간다.  


여행을 하며 만난 이제 갓 3년 차를 넘지 못한 친구들이 있다. 나보다 좀 더 용기를 일찍 낸 그들도 어쩌면 그 여행의 끝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순수하게 정직하게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우리는 너무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그나마도 방법을 안다면 다행이지만 길이 보이지 않다면 더더욱 여행의 경험이 좀 더 뻔뻔해지고 거침없어지며 흔히 말하는 수완이 늘어가는 디딤돌이 될 뿐이다. 앞날이 창창한 친구들에게 이런 악담을 하는 내가 너무 나빠 보인다. 그러나 전재산을 들고 온 그들에게 하루 한 끼 식사를 사줄 정도의 여유가 되는 나 역시도 그저 그들의 다른 미래일 뿐이다. 돌아가서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이 그대로니까. 나보다 나을 거라고 말하는 긍정적인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좋은 것, 나쁜 것 혹은 바른 것, 옳은 것이라는 성격이 붙기 마련이다. 여기에 내게 좋은 것과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 공존하면 더없이 좋겠다만 그렇게 쉽고 단순하지가 않다. 내게 좋은 것들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혹은 누군가의 억눌림 위에 존재한다. 내가 누군가를 밟고 서있다는 사실은 나를 누르는 누군가 때문에 자각되지 않는다. 아무도 위가 아닌 아래를 보지 않으니까. 아래를 본다한들 손 내밀어 위로 올려줄 수 있는 힘 있는 이들도 아니다.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너를 밟고 있고 또 다른 너는 나를 밟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모두가 좋게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사춘기를 지난 지가 20년이 넘었건만 나는 아직도 소녀 시절에 보았던 어느 잡지책에서의 자유, 평등, 정의 따위가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뭐, 이것도 나의 능력 없음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분명 누군가는 그럼에도 한 발자국을 나가서 더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밤새 치열하게 살아갈 테니까. 나는 지금 그렇게 치열해지고 싶지 않은 변명 비슷한 것을 늘어놓는 것이다. 


백수는 점점 성장한다. 생각도 많아지고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마치 무궁무진한 꿈을 쉬지 않고 꿀 수 있는 최고의 전성기 같다. 다만 상상력을 무시할 만큼의 현실감각이 가지고 있고 내가 꿈꿨던 소망했던 것들을 가슴에서 지워버리지 않는다면 실현의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이런 얘기 많이 들었다. 회사 다니기 죽도록 싫다가도 나와보니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도 잔챙이 악마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도 저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일단 외면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열심히 은행 잔고를 축내며 백수의 전성기를 보내다 보면 잔고가 털려서든, 생각이 변해서든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다. 


아는 언니가 그랬다. 아직 네가 덜 놀아서 그렇다고. 좀 더 놀라고.


그래서 조금 더 놀기로 한다. 조금만 더.

기왕 놀거면 걱정없이 놀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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