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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Sep 06. 2017

회사 사람

김실장이 백수가 되는 동안 멀어진 이야기.

티브이의 어느 예능에서 친구가 없다고 서로를 구박하다 어느 순간 아내에게 남편이 말한다. 

나는 친구 있어. 바로 너. 

내 이야기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지금 내게 친구란 건 바로 옆에 같은 백수인 짝꿍, 그리고 또 누가 있을까. 


잠시나마 지난 나의 인간관계를 돌아보았다. 항상 나는 친구란 것의 개념이 헷갈렸다. 연애할 때도 비슷하게 헷갈렸다. 연락을 주고받고 일거수일투족 많은 것을 공유하는 편이 아닌지라.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관계는 항상 나를 고민하게 한다. 어디까지가 적정한 선일까. 그래서 항상 극과 극을 달렸다. 적당히 적절한 것을 유지하는 법을 모른다. 


고민의 시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던 왕따의 경험이 있는 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친구는 많지만 애착은 없는. 어떤 한 사건으로 빚어진 왕따의 기억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냥 어른이니까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학기 동안 이어졌던 그 시절,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인과관계가 보이지만 그 당시엔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받아들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상위권에 있던 나는 한순간에 아무도 가지 않는 섬이 되었다. 그 당시 도시락을 같이 먹던 친구들 중 몇몇이 다른 친구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끝까지 나와 밥을 먹어준 이가 지금도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3학년이 되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왔다. 


나만 빼고. 


소속감을 가지고 매일 얼굴을 보며 부딪히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쉽게 회복되는지를 보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의미부여를 하지 말자 다독일수록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에 관계에 더 많은 노력을 했고 그러면서 정작 깊은 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는 내게 문제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이게 내 사는 방식이려니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양한 관계가 생겨났고 나의 인간관계론은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변화 중이다. 


처음엔 내가 혼자 있는 것보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믿었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며 친구와의 만남보다 혼자임을 더 즐기기 시작하며 친구라는 개념이 바뀌었다. 꼭 서로의 안부를 알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그렇게 조금씩 혼자 지내는 생활로 변해갈 즈음, 나는 회사에 들어갔다.


자연히 20대 중반에 들어간 회사에서 만난 이들이 20대의 인간관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나를 이끌어 준 사람, 이끌어 줄 사람, 내가 이끌어 주고 싶은 사람까지. 서로의 이해관계와 인간적인 호감이 뒤섞여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로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억지로 팀으로 묶인 경우도 많았다. 학교랑 비슷하다.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니까 좀 더 성숙해야겠지만 반대로 더 유치하고 상식적이지 않은 경우가  빈번하다. 어른들의 상상력은 때론 아이보다 잔인하고 성적보다 무서운 고과 앞에서 연차가 높아질수록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정치라는 게 별거 아니다. 그냥 나 좋아하는 사람 밀어주는 거다. 으뜸은 적이라 불릴만한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다. 두루두루 편하게 그러면서도 뒤로는 서로를 엄청나게 물어뜯는 회사에선 소문이 너무 많았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누군가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위로를 받는 것, 회사 안에서 그런 이를 만났을 때 엄청난 행운을 얻은 것만 같았다. 그런 이들은 꾸준히 하나둘씩 회사를 나갔다. 


그렇게 누군가가 회사를 떠나고 들어왔다. 9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떠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언제나 회사 사람으로 살 줄 알았다. 게다가 신입부터 들어와 차근차근 성장하였으니 나도 몰랐던 애사심이 있긴 했나 보다. 회사의 역사가 내 역사였고 내 청춘을 써 내려간 곳이 회사였다. 


매일 밤 술을 마시며 인맥을 넓혀갔던 신입시절을 지나니 후배들도 많아졌다. 요즘 같아서는 허용되지 않았을 쓸데없는 회식자리들의 비용이 다 내가 받을 보너스를 축내는 것이었음을 한참 후에서야 알았다. 더 이상 회사 돈을 자기 주머니처럼 쓰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회식자리가 줄고 회사가 아닌 진짜 내 시간을 채울 사람들끼리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래 봤자 회사와 학교가 어우러진 같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으론 30대를 맞이하자 다시 오랜 친구들과의 공통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 하는 것 같아도 집단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아무리 월급 차이가 나도 서러운 일은 비슷했고 억울한 일도 비슷했다. 언젠가부터 이야기가 없이도 그저 시간을 때워도 편해지는 이들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같은 취미를 만나 전혀 내 삶과 관계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주변에는 회사 사람과 그저 어쩌다 만난 편한 이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희망퇴직을 결심하고 그동안 알고 지낸 모든 회사 사람들이 고맙고 그저 아쉬웠다. 모시던 분들이 임원에서 나가는 모습도 보고 후배들이 꿈을 찾아 떠나는 모습도 보았다. 막상 내가 나간다니 처음으로 떠나는 일을 겪어보니 복잡한 심경이었다. 살면서 언젠가는 만나겠지 싶다가도 다시는 못 만날 이들 같아 내 청춘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느낌이다. 


관계는 노력이야. 

먼저 떠났던 언니가 말해주었던 조언을 가슴에 새기고 노력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해보자고 맘을 다졌다. 회사를 떠나도 사람은 잃고 싶지 않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난 회사 사람은 별개의 인간관계로 생각해왔다. 자의가 아니라 필요와 타의에 의한 관계라고 믿었다. 먼저 떠났던 이들과 멀어졌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노력이 필요한 관계는 처음부터 별 거 아닌 관계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출근을 멈춘 지 일 년이 되어간다. 어떻게든 일주일에 한 번은 마주쳤던 이들과 약속을 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 지 일 년이 된다. 그리고 나의 노력은 일부 계속될 것이고 일부 멈출 것이다. 


관계란 게 항상 서로에게 같을 수밖에는 없을 터, 일 년이 다 되어가니 그 경계가 보인다. 자연스럽게 희미해진다. 내 맘같이 따라오지 않던 후배 때문에 한참을 망설이다 냉정하게 부족함과 불성실함을 얘기했을 때, 나보다 더 냉정하게 선을 긋는 후배를 보며 깨달았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야 깨달았다. 좋은 선배란 학교에서나 찾는 거라고, 그저 좋은 상사로 남았어야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회사 사람과의 관계가 똑같을 거라고 믿었지만 나는 그저 지난 동료에 불과하다. 지난 동료끼리 만나면 추억인 얘기가 그들에겐 현실이다.  같이 웃고 울던 것들이 내겐 과거지만 그들에겐 아직도 진행형이다. 


회사라는 화두를 벗어나 그저 오래된 친구로 남고 싶다. 그러나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 나는 예전과 다르다. 나도, 회사 사람도 서로에게 다른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제는 노력을 멈추고 이제 지난 회사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멀어질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힘겨운 출근도 아침인사가 있기에 활기찼다. 짬을 내서 마시는 커피는 넘어가는 게 욕인지 커피인지, 그래서 맛있었다. 회사와 사람들의 이중성에 토 나올 것 같다가도 나도 별다를 게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안쓰러웠다. 그 모든 시간과 공간들이 회사, 그 안에 남겨져 있다. 더 이상 회사 사람이 아닌 나를 빼고.


우습다. 벗어나면서부터 아쉬움이 시작되는 게.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그리운 사람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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