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라이더의 여행법.
4일 만에 치타에 들어온 우리는 서로에게 잔뜩 긴장감을 뿜는 중이다. 첫날 시내 주행에서 제자리 쿵을 한 탓에 짝꿍의 긴장장은 내내 최대치를 찍었던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하루 만에 체력과 마음가짐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은 나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좋기만 했다.
어쩌면 저렇게도 조심성이 없고 매사 그저 기분이 좋기만 한 걸까.
왜 여기까지 와서 즐기지 못하고 무섭게 다그치며 긴장을 풀지 못하는 걸까.
매일 여기서 달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그 생각이 방향은 같아도 무게감이 다르다. '누군가 다쳐도 그건 나와 너의 선택이니까.'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이 모든 여행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삶의 무게를 각자 알아서 짊어지는 법이라는 평소의 신념과 달리 언제부턴가 그는 내 삶을 짊어지고 있다.
나는 여태껏 일을 해왔다. 단 한 번도 그저 쉬어본 적이 없다. 세 남매 중 둘째 딸인 나는 자립심이 강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에 사활을 걸었다. 물론 연애와 기타 놀이 생활도 부모와의 기대를 저버리고 내 인생이라는 기조 아래 맘껏 누렸다. 20살 이후로 누구에게도 선택을 미루지 않았으며, 조언도 듣지 않았다. 대신 그 책임을 오롯이 짊어졌다. 그래서 실수도 많이 했고 지우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도 참 많다. 그런 강한 성격(=곧 죽어도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꺼라는 쓸데없는 고집) 탓에 그와의 결혼도 가능했다. 어차피 말려도 안 들을 테니까. 처음 연애를 시작했던 때, 인생선배인 그가 많은 것을 이끌어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선을 그었다. 아니, 그가 선을 그었다. 그렇게 각자의 성장을 도와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연애가 끝나고 결혼을 한 후로 나는 혼자였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저질렀다. 대책 없이 일을 그만두고, 나중은 나중에 생각한다며, 잘 타지도 못하는 바이크로 여기까지 왔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을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것이 그에겐 익숙한 것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만큼 나는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나를 짊어지고 있다.
그에겐 부담감이었을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배출해왔다. 믿고 맡기겠다. 여행의 모든 것을, 그저 나는 따라만 가겠다. 그것이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혼자서는 너무나 쉬웠을지도 모르는 여행이지만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는 바이크 여행은 처음이다.
바이크 여행은 위험하다. 라이더는 항상 그 위험 앞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아는 것,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는 것,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까지도 나는 그에게 맡겨버렸다. 3월에 면허를 따고 고작 3,000km의 주행거리는 이 여행에 완벽한 조건이 아니다. 낯선 나라의 거친 도로를 달리겠다고 뛰어는 나에게 많은 이들을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응원이 필요한 것은 나를 이끌고 이 먼 여행을 완주해야 하는 리더, 나의 짝꿍이다. 그에게는 그 위험이 몇 배나 커진 셈이다.
초보 라이더, 나는 이제야 라이딩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모든 것을 그에게만 미루지 않고 함께 찾고 고민하기로 한다. 다만 결정은 충분히 얘기를 나눈 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일 만에 우리는 규칙이 생겼다. 속도를 조절하는 것부터 세세한 라이딩을 습관을 서로 맞춰가는 것까지.
그리고 초보 라이더인 내게도 몇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모든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로 상황, 날씨 상황, 일정의 가능성, 우리의 몸 상태, 숙소 선택과 점심 선택 등.
다시 한번 여행의 본분을 생각해본다. 우리의 계획은 바이크를 타고 유라시아를 누비는 것, 바로 그뿐이다. 특별한 장소에 욕심을 내지 않기로 한다. 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그러니까 굴러갈 수 있는 곳으로만 가기로 했다. 앞으로도 내가 감당하기 힘든 비포장도로와 악천후는 피하기로 한다. 어디로 가든 라이딩은 계속될 것이고 그것 자체가 우리에겐 특별할 것이다.
엄청난 여행이다. 하지만, 돌아간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여행이기도 하다.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사람, 인생에서 제일 잘 만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언제나 내 편일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이 험난한 여행을 선택했다. 모든 여행은 생각지도 못한 위험한 순간이 찾아온다. 못된 사람을 만나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그저 운이 나빠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서로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생기면 그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도 괜찮다. 참느라 받는 스트레스 대신, 모든 감정을 서로 받아주기로 한다. 진짜 서로에게 화난 것이 아님을, 그 짜증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기로 한다.
우리는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나는 부부 라이더이다. 나는 좀 더 분발하기로 한다. 이미 그의 짐으로서 출발한 여행이다. 이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은 고집, 이만하면 나도 할 말 있다며 대꾸하던 똥 같은 자존심을 차곡차곡 접어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누군가는 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동반한 부부 라이더에게 타협은 그 누구도 만족하지는 못하는 차악일 뿐이다. 최선은 '당신의 선택을 믿습니다.' 그저 믿고 따라가는 것이다.
치타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하기도 전에 다시 떠나야 한다.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다. 지도와 날씨 검색이다. 적어도 삼일 동안의 날씨를 검색해야 한다. 어디에 비구름이 몰려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하고 일주일의 목표지점을 선택한다. 여러 가지 옵션을 만들어본다. 관광을 위한 여행이라면 어디가 좋다더라, 축제를 언제 열린다더라, 쇼핑은 어디가 좋다더라 등의 검색을 하느라 준비시간을 다 썼을 것이다. 우리에겐 그저 안전하게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좋은 도로를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우선 현지인에게 일주일 후에 도착해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 가는 가장 좋은 상태의 도로를 물어본다. 확실히 구글의 위력은 엄청나지만 현지인들이 피하는 길이라면 되도록 알아두고 다양한 코스를 미리 알아두는 게 낫다. 그 후엔 중간중간 쉬는 도시의 크기를 살핀다. 꼭 들러야 하는 곳은 바이칼 호수이다. 중간지와 최종 목적지를 결정한 후엔 하루에 달릴 거리를 조정한다. 무리는 하지 말자고 정한 선은 하루에 800km이다. 그 이상 오래 달리지 않기로 한다. 앞으로 달려야 할 길이 너무 길다.
하루는 치타 관광을 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간단하게 끝을 낸다. 도시는 공산국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예전의 영광을 되살리기엔 살기가 팍팍한 듯, 오래된 건물들은 전혀 생기가 없다. 그마저도 독특하다며 애써 포장을 해보지만 그저 스러져가는 지방 소도시에 불과하다. 한 때, 그 무엇보다도 불타올랐을 사람들의 열정이 빛바랜 채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러시아가 강대국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라의 힘은 속해있는 도시, 개개인과는 별개이다.
앞으로 달릴 도시들도 비슷할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보았던 흙빛으로 변해버린 판잣집이 떠오른다. 누군가가 분명 살고 있음에도 마을은 죽은 도시 같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지. 막상 내 꿈도 분명치 않으면서 그네들을 생각한다. 각자의 행복한 삶이 있겠지. 소박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님을, 화려한 서울에 불행한 일개미가 얼마나 많은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시골 마을보다도 낙후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라 말하기 힘든 슬픔이 올라온다.
언제쯤 강대국인 러시아의 대단한 도시를 만날까.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이미 기대는 사라졌다. 러시아의 현재, 어둡고 불편한 진실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어느 나라도 빈인빈 부익부에서 자유롭지 않고, 부패가 만연하다지만 내 머리속에 어느 항공사의 광고가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러시아의 민낯은 참 다르다.
사람의 손 때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자연을 평화롭게 달리다가 하루 묵어가는 마을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진다. 마치 동화 속을 거닐다가 현실로 소환되는 것만 같다.
이제 곧 동화 같은 바이칼 호수와 첫 번째 점검을 받을 노보시비르스크에 간다.
긴 라이딩은 계속되고, 초보 라이더의 주행거리가 쌓여간다. 어제까지의 수많은 풍경을 뒤로한 채 내일부터는 새로운 시베리아를 만나러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