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nA Sep 20. 2017

처음 만나는 세상

울란우데 가는 길

파랗고 맑은 하늘, 그 아래로 펼쳐진 언덕 사이로 좁다란 길이 뻗어있다. 이틀 내리 비가 내리더니 새롭게 출발하는 오늘은 맑음이다.  치타를 벗어나는 길의 상태는 들어왔던 길과 비슷하다. 날씨의 영향이 크다. 들어오던 그 길은 그렇게 어둡고 조심스럽더니 나가는 길은 밝고 명랑하다.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삼십 분 여를 달리자 도시를 완전히 벗어난다. 시야에는 건물이라 부를만한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날씨가 맑아도 바람은 잠잠하지 않다. 시베리아의 여름은 우리의 봄과 같다. 걸어 다니기에 딱 좋은 날씨이지만 바이크를 타고 시속 100km를 넘기니 처음엔 어깨가 시리더니 몸 전체가 떨려온다. 잔뜩 웅크린 몸에 바람이 부딪힌다. 휘청 거리며 앞으로 나아간 사이 구름이 쉴 새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결국 멈춰 선다. 우비를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빨간 두카티 스크램블러 위로 커다란 노란 병아리가 털썩 앉아있다. 노란 병아리가  안전을 위해 쓴 대두 헬맷은 빨간색이다. 총 천연색 내 모습이 러시아의 초록 언덕 위, 파란 하늘 아래 참으로 잘 어울린다. 잔뜩 껴입었음에도 워낙 넉넉한 사이즈라 우비가 많이 크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우비는 세차게 흔들린다. 추위보다는 주행풍을 견디기로 한다.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된다. 오늘은 그야말로 눈이 호강하는 날이다. 여전히 지은 지 오래된 통나무집들이 계속된다. 간간히 최근에 페인트를 덧칠한 집들이 눈에 띈다. 희한한 파란색과 초록색이다. 아마도 개인의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약속한 듯, 똑같은 페인트 색으로 칠해진 창문과 울타리들을 발견한다. 그 색들 마저도 눈에 익어버리니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래전 지어진 똑같은 집들이 색마저도 같다. 공산주의 시대가 남긴 흔적이다. 변화된 시대가 와도 세상은 지난날의 흔적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변화된 시대마저도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 년 전 러시아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내가 너무 빠른 세상에서 살다 온 탓은 아닐까.

마을조차도 나타나지 않는다. 저 멀리 내가 지나온 산들 위로 구름 떼가 지나간다. 울퉁불퉁한 도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바람만 좀 잦아들면 라이딩하기 훨씬 수월 할 텐데, 바람을 걸러낼 나무가 없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는 낮은 높이의 풀만이 가득하다. 어딘가의 불을 밝혀줄 전봇대가 도로와 함께 일렬로 서있을 뿐이다. 하늘이 하도 파래서 내가 보아왔던 하늘이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지구에 살았던 거 맞는 거겠지. 희한하게 자꾸 꿈 속인 것만 같다. 이렇게 깨끗한 하늘 아래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대지 위에 내가 달리고 있다. 현실성이 자꾸만 떨어져 간다.


비구름이 막 지나간 터라 아직 마르지 않은 흙과 풀들이 싱싱하다. 날 것의 세상에 들어선다. 최첨단을 달리는 휴대폰과 노트북은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동안 무던히도 많은 뉴스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포털에 올라오는 각종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오르는 동안 무엇을 잃었던 것일까.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포털 사이트가 알려주는 세상에 살았다.  간신히 작동되는 인터넷을 더 이상 들여보지 않는다. 그렇게 오로지 달리기만 하면 된다. 하루가 매우 긴 것 같은데 한번 바이크에 올라타면 몇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너무 다른 지금이다. 나는 얼마나 하늘을 보지 못한채 어딘가에 코를 박고 살았던 걸까. 그 괴리감에 점점 더 꿈 속 같은 느낌이다.


오늘도 가야 할 길이 멀다. 610km, 쉬지 않고 달리면 8시간 걸린단다. 쉬지 않고 달릴 수 없고 바람이 도와준 덕분에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절반을 못 미친 거리에서 맴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어제 사놓은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한적한 버스 정류장에 멈춰 자리를 깔고 앉는다.  

몇 입 떼어먹었을 뿐인데, 배가 부르다. 라이딩의 시작을 기분 좋게 시작해서인지 계속 웃게 된다. 쪼그려 앉아 마냥 좋아하고 행복하고 기쁘다며 중얼거리는 나를 보고 짝꿍도 기분이 좋다. 여행 오길 잘 했다. 바이크 타길 정말 잘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오빠와 만나길 참 잘했다로 중얼거림이 끝이 난다.


평생을 살아갈 누군가를 만난 이후, 그러니까 짝꿍을 만난 이후 인생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런데 울어야 될 순간에도, 슬퍼야 할 순간에도, 나는 더 행복해졌다. 생각해보면 내 맘대로 살던 어린 청춘이었던 날엔 매일이 외롭고 슬펐다. 지금 나는 어린 청춘이었던 그때보다 더 망나니처럼 날뛰고 있다. 혼자였을 때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걸 보면 우리인 지금이 좀 더 나다운 나를 만들고 있다.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으면 어떠냐. 내가 더 나답게 살아가고 있는데!


힘들면 포기해도 괜찮아.


처음으로 1,000km를 달렸던 날, 앞서 달리던 짝꿍은 나를 걱정하며 포기라는 말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나를 토닥였다. 우리에겐 절대 가야 목표는 없는 거니까. 내가 여행을 선택한 계기는 오랫동안 꿈을 꿨던 짝꿍이다. 그리고 여행을 지속하는 힘 역시 그 꿈을 강요하지 않는 짝꿍이다. 포기해도 되는 여행이 되니 오히려 즐겁다. 우리는 여유가 넘친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면 된다. 아름다운 순간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저 달린다. 숨 하나 조차 신경 써야 하는 라이딩이 계속 되어도 힘들면 언제든 함께 쉬어줄 당신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 힘들지 않다.


쭈욱 앞으로 달린다.

오후가 되자 온도가 제법 따뜻해졌다. 그래도 아직 우비를 포기할 수 없다며 빨강 두카티 위의 노랑 병아리인 채로 새로운 지역으로 접어든다. 갑자기 어두운 구름이 밀려온다. 가늠할 수 없는 날씨이지만 하늘은 미리 우리에게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신호를 보내준다. 진한 먹구름은 아니지만 제법 통통한 구름 떼이다. 한참을 그 구름 밑으로 달려본다. 어찌나 통통한지 해를 다 가려버렸다.


비가 와도 괜찮다. 모든 것이 다 괜찮다. 지난주, 미친 듯 달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경험은 나를 베테랑의 마음으로 무장시킨다. 실력과 별개로 마음을 무장하니 그저 다 괜찮아진다.

구름 떼를 지나가자 다시 맑음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변하고 주를 넘나 든다. 지도에는 Republic of Buryatia, 부랴트라는 지명이 뜬다. 러시아에 편입돼있는 자치구이다. 몽골이 바로 아래 있고 좀 더 위쪽엔 바이칼 호수가 있다. 오늘 우리가 머물 울란 우데가 이 곳의 중심도시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치공화국이다. 울란 우데에는 러시아인보다 우리와 묘하게 닮은 몽골인이 더 많다.


두 번째 주유가 필요한 시간이 왔다. 주유 등이 켜지니 마음이 급해진다. 반대편 차선에 위치한 주유소임에도 과감히 가로질러 들어간다. 도로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주유소에 올라서자 새로운 풍경이 펼져져 있다.  주유소에서 멀리 떨어져 기호식품을 피우며 마음의 안정을 찾던 짝꿍이 소리를 지른다.


여기 좀 봐. 다 큰 어른이 깡총거린다.  

한참을 머무르다 바이크에 시동을 건다. 출발할 시간이다. 다시 이런 풍경을 마주칠 수도 있을 거야. 굽이진 언덕 사이로 길이 나있다. 급해진 마음에 들어간 주유소를 나서자 길 곳곳에 주유소들이 즐비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체인 주유소를 보자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마도 저곳은 화장실이 조금은 더 깨끗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선택은 끝났다.


이윽고 주유소에서 보았던 언덕들이 나타난다. 구름이 거짓말처럼 둥실거린다. 동시에 멈추자라는 말이 나온다. 티브이에서 보던 풍경인가. 뭔가 낯익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감동이 밀려든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사람 하나 없다. 지나가는 트럭들이 이 곳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달리던 곳을 바라보다 달려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낯익은 풍경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회사에 입사하고 한동안 바꾸지 않았던 윈도 배경화면이다. 실제 촬영 장소는 이곳이 아닌데 신기하게 그 푸르름이 그 환한 하늘이 비슷하다.  순간 일하던 내가 갑자기 순간 이동한 게 아닌지 헷갈린다. 이게 꿈이라면 매우 실망스러울 것만 같다. 지금 나는 꿈같은 여행을 하고 있는 거다. 떠나길 참 잘했다. 오늘을 만들어 준 어제의 비구름에 감사하다.

상상하던 것들을 현실로 만났다.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지 았던 그 이미지들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이게 자연의 위대함인가. 이 아름다운 곳이 계속 이대로 지켜지길 빌어본다. 개발이 되면 아마 가장 좋은 뷰에 호텔이 생길 것이고 편의시설들이 길가에 늘어서고 주차장 때문에 언덕이 깎일 것이다.


구글 지도 :  a/d Baykal  Mukhorshibir'  Buryatiya Republits   Russia   671349


마음속에 좋은 느낌이 가득 차 오른다. 구름 위로 내 마음이 둥실거린다. 파란 물결이 바이크 위로 쏟아진다. 구름의 그림자는 저 멀리 언덕의 음영을 만들낸다. 저곳까지 단숨에 날아가고 싶다. 더 높이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볼 수 있을 텐데, 여기까지 오고 나니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어 진다. 난데없이 욕심이 생긴다.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댄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시간이 지나는 것이 아쉽다. 내일은 못 만날 풍경이다.  바이크에 시동 걸기를 망설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꾸 아쉬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달려야 하는 여행에 멈추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충분히 즐기고 떠나자. 점프에 셀카에 실컷 사진을 찍고 한참을 멍 때려 본다.

눈을 감아본다. 다시 그 하늘이 펼쳐진다. 이 여행이 끝나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거면 충분하다.


몇 번이나 풍경이 바뀐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만 같다. 다시 라이딩을 시작하니 이번엔 강이 나타난다. 강을 끼고 도로가 나있다. 거친 암석들이 나타난다. 주먹 모양의 커다란 지형이 강 가운데에 솟아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한 탓에 멈추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한다. 해가 지기 전에 도시에 도착해야 한다. 강은 울란 우데까지 이어진다. 40km 남았다. 도시가 보여야 하는데 강을 따라 도로가 이어져 있을 뿐 쉽게 나타날 것 같지가 않다.


도로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진다. 공사차량이 많아지더니 어느새 길에는 차가 가득이다. 퇴근 시간대와 맞물린 탓인 듯하다. 차들이 많아지니 안심은 되는데 흙이 일어나 시야를 가린다. 지도에는 없는 길로 차들이 들어선다. 앞쪽이 공사 중이라 우회해야 된다. 자갈이 가득한 골목길 사이로 흔들거리며 접어든다. 다시 몸이 바짝 긴장된다. 숙소를 외곽 쪽에 잡았는데도 도시로 접어드는 길은 힘들다.


엉망인 길을 욕하면서 주위를 살펴본다. 도시 안쪽이 아닌 외곽의 베드타운인 듯하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들의 일상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내가 있다. 이 순간이 신기함으로 다가온다. 내가 바이크를 타고 있는 이 순간, 아직도 내가 떠나온 곳에서 내 옛 동료 들은 일을 하고 있을 테고 부모님은 밭에 나가거나 잔디를 다듬고 계실 것이고 친구들은 아이를 돌보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내 일상 역시 그러했는데, 어느 순간 바이크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왔다. 오늘은 그 뿌듯함에 장거리 라이딩에 지친 피로도, 주차를 하며 힘겨웠던 짝꿍과의 사소한 다툼도 별거 아닌 일이 돼버린다. 자신을 끓임 없이 의심하고 현재를 채찍질하며 최선을 다해 살았던 날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 날들을 부정하고 후회하는 여행이 아니다. 여기의 나를 만들어준 지난날에 감사하는 여행이다. 내일도 내일모레도, 언젠가는 끝날 나의 유라시아 횡단 여행의 앞으로의 모든 날은 그 지난날의 나에게 감사하는 날이 될 것이다.


오늘을 열심히 산 사람들이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떠난 순간부터 행운이 시작될 것이다. 지난날이 고마울 것이고 여행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그만두고 떠나시라. 지금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을 놓치지 마시라. 떠나보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산 사람인지, 이 여행으로 인한 공백이 내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알게 된다.


처음으로 만난 풍경 앞에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지나간다. 그 순간, 지금의 내가 달라진다. 그렇게 인생을 쭈욱 달려본다. 어차피 끝없이 난 길로 가야하는 여행이고 끝을 모르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다. 잠깐 다르게, 지금까지와의 삶을 바꿔본다고 그 끝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멀리 와서 열심히 살았던 나를 마주하고 나서야 알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보 라이더의 깨달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