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호수 가는 길
울란 우데를 벗어나는 아침, 오랜만에 만난 현대적인 시설과의 이별이 아쉽다. 울란 우데 외곽이지만 나름 도심지의 끝자락이라고 대형마트와 쇼핑몰, 그리고 루프탑 레스토랑이 있는 현대적인 호텔이었다. 돌이켜 보면 가장 좋은 숙소 중에 하나로 꼽힌다.
그렇게 좋은 곳에서 출발하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새벽같이 조식을 방에서 먹고 나서는데 다음 목적지인 이르쿠츠크의 숙소가 계속 문제이다. 분명 서로에게 얘기를 했는데 알고 보니 서로 다른 곳을 얘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터넷은 잘되다가도 숙소 예약 앱을 켜면 오류가 나기 일쑤이다. 분명 어제 예약을 하고 잤는데 오늘 보니 안 돼있고 중간에 예약을 취소했는데 아직 그대로이다. 러시아의 인터넷은 생각보다 아주 불편하다. 초고속 인터넷이 익숙해진 우리라서 유독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고 괜찮은 척해본다. 숙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나마 인터넷이 되는 울란 우데의 호텔을 나올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른다. 서로 눈치를 살핀다. 내가 예약 한터라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고 전화까지 쓴다.
로비에 내려가서 가방을 실어 나르는 와중에도 메일을 쓰고 있다. 짝꿍은 화가 났다. 나는 눈치를 살핀다. 부부의 여행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오늘 아침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없다. 나는 그냥 미안한 죄인이 되기로 한다. 둘이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써봤자 서로 마음만 상할 뿐이다. 누가 잘못했는지보다 누가 화났는지가 중요하다. 서로에게 서운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한 사람이 화가 나면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미안하기로 한다. 먼저 화가 나는 사람에게 더 유리한 게임 같지만 나중에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엔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까 먼저 화낸 이가 사과를 받지만 결국 더 미안해져서 지는 게임이랄까.
한참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완벽히 정리하지 못하고 찜찜한 채 결국 출발한다. 출근시간과 겹쳐 밀린다. 도시를 관통하는 길은 잠깐이었고 바로 위쪽으로 빠진다. 의외로 넓은 길과 다리가 나타난다. 시내를 빠져나와 그 넓은 길을 만나는 사이에 이해할 수 없는 유턴 길이 나타난다. 지도를 의심하며 조심스럽게 접어들며 가슴이 통닥거린다. 여기서 잘못 접어들면 한참을 돌아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길은 극과 극이다. 너무 직진이라서 지도를 볼 필요가 없는 단순한 대륙의 길과 과연 이 지도가 맞을까 싶은 이해 할 수 없이 얽히고설킨 길. 도심이 더 스트레스가 쌇인다. 오늘 향하는 바이칼 호수 옆의 이르추크츠는 더 크다. 그곳에 접어드는 길 또한 이럴 텐데, 걱정이 앞선다.
짝꿍은 바이칼 호수에 대한 기대가 크다.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호수, 나름 파도도 치고 신기한 물고기도 산다는 그곳, 지도에서도 그 커다란 크기가 눈에 딱 띈다. 하루 한 바퀴 도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르추크츠로 향하는 길에 바이칼 호수를 끼고 가야 한다. 오늘이 그리도 기대하던 날이었건만 아침부터 기분이 구겨진다.
한 시간 즘 달렸을까. 숲이 나온다. 산을 넘어가자 또 산이 나온다. 길 상태가 오락가락이다. 산자락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신기하다. 대부분 산을 넘어가면 중턱 즈음 완만한 커브길을 만들기 마련인데, 무조건 직발이다. 경사진 도로 위로 우리 바이크가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저 앞의 도로라는 게 생기기 전부터 운행했던 것 같은 낡은 트럭들은 오르막길에서는 숨이 멎을 것 같이 쿨럭거리며 시커먼 방귀를 뀌어댄다. 어떻게든 그들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하지만 오르막길에서의 추월이 아직 익숙지 않은 탓에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다.
부부 라이더의 어색했던 기류가 어느새 사라진다. 짝꿍의 한숨 섞인 담배 연기 사이로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늘 하루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다시 노란 우비를 꺼내 입는다. 산악지대가 계속된다. 찬 바람이 숲 속 어딘가에서 훅 불어온다. 잔뜩 웅크린 몸을 펼쳐본다. 저 멀리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난다.
이윽고 바이칼 호수로 접하는 길이 나온다. 이제 이르쿠츠크까지는 200km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이 정도 거리에 3시간이 걸린다니 뭔가 셈법이 이상하다. 시속 60km로 생각해도 이렇게 오래 걸릴 거리인가 싶다. 바이칼 호수를 옆에 둔 순간부터 길은 오르막 내리막에 큰 코너링이 더해진다. 러시아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코너링 구간이 계속된다. 니 그립을 꽉 잡고 어깨에 힘을 풀어본다. 바이크를 최대한 눕혔다가 다시 스로틀을 당긴다. 반복되는 코너링에 익숙해질 즈음 바이칼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이 맑게 개이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다. 파란 하늘과 호수의 수면이 아주 희미한 선으로 구분된다.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이다. 한 눈을 살짝 판 것도 그때쯤이다. 생각보다 큰 코너링이 내리막길에서 나타난다. 다시 눈을 길로 돌려본다. 타이밍이 늦은 탓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버리니 바이크가 눕질 못한다. 결국 중앙차선을 넘어선다. 반대편 차선에 차가 없어서 큰 일은 나지 않았지만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바이칼 호수는 멈춰서 보기로 하고 라이딩에 집중한다.
호수의 끝자락으로 향하니 마을이 나타난다. 제법 관광객들이 많다. 기차역이 있는 걸 보니 바이칼 호수를 도는 관광열차가 지나가는 곳인 듯하다. 차들도 많아진다. 왠지 모를 안도감에 숨이 제대로 쉬어진다. 더 이상 힘든 길이 없을 거란 예감이 든다. 코너링이 엄청 있었던지라 이제 100km 남았는데 오후 3시이다. 남은 거리도 짧고 날씨도 좋아져서 다섯 시 전에 들어설 수 있을 것 같다.
마을을 지나고 다시 산길로 접어드는 구간에 한눈에 바이칼 호수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멈춰서 사진 한 장 찍으려 했는데 그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래서부터 막힌다. 헤어핀이다. 180도로 코너가 꺾이며 오르막이 시작되는 중간이 그 지점인 듯하다. 트럭과 자가용, 그리고 바이크가 섞여 느릿느릿 올라가는 길에 멈추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사고가 많았던 모양이다. 가까이 가니 전망대였던 그곳은 폐쇄되었다. 아쉬움보다 갑자기 시작된 급경사에 겁에 질린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코너와 경사, 끝없이 계속되는 길에 다시 긴장감이 바짝 들어선다.
한 고비를 넘겼다 싶어 멈춰 선다. 길의 상태는 훌륭하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맞춰 추월차선이 있다. 그런데 트럭들과 자가용 사이에 끼면 답이 안 나온다. 기어코 우리를 넘어서서 트럭까지 한 번에 추월하는 자가용들의 배짱에 박수를 보낸다. 언젠가부터 말이 없어진 짝꿍은 두대나 되는 바이크의 추월 거리를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팠던 모양이다. 성질 급한 자가용 운전자들에 비하면 앞을 미리 내다보고 추월하기 좋은 시점에 신호를 보내오는 트럭 운전자들은 천사이다. 짝꿍의 신호에 맞춰 추월할 때는 시속 100km에서 130km로 속도를 최대한 빨리 높여야 한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엔진 브레이크를 어설프게 시연하며 속도를 높였다 줄였다 반복하느라 오른쪽 손이 저릿하다. 짝꿍의 칭찬에 으쓱하는 사이 우리가 추월했던 트럭들이 멈춰 선 바이크를 금세 따라잡는다.
남은 거리 50km. 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멈췄지만 다시 우리 앞으로 나아간 트럭들을 보자니 마음이 급해진다. 하늘엔 다시 먹구름이 밀려온다. 어두워진 하늘만큼 마음도 무겁다. 다시 출발하려는데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제발 비야 오지 마라.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난생처음 보는 풍경들을 즐길 겨를이 없다. 오늘의 주행코스는 바이커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코스인데 나는 즐길 수가 없다. 빠르게 주변이 변한다. 숲 속에서 나와 호수를 지나 다시 숲 속으로. 주행거리는 짧은데 주행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길어진다. 도착시간은 점점 뒤로 밀려간다.
이윽고 이르추크츠가 보인다. 꽉 막힌 도로만큼이나 마음이 답답하다. 빗방울이 도시 근처로 가니 다시 굵어진다. 매번 입성이 쉽지 않다. 비가 쏟아지는 건 이제 법칙이 된 듯하다. 도시로 들어서자마자 도로 상태가 개판이다. 여기저기 파인 데다 차선이 희미해져 있고 여기저기 끼어들고 신호 체계가 낯설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저 끝에 우리의 숙소가 있는데 일방통행인지 한참을 돌아가라고 한다. 숙소 앞에 도착하고 주차장을 찾아 들어선다. 6층에 우리나라 대사관이 있단다. 건물 앞에 태극기가 힘차게 휘날린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숙소 앞에는 바이칼 호수와 연결되는 강이 잔잔히 흐른다. 노을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이 점점 붉어진다. 배가 고픈지도 모른 채 오늘 하루 열심히 달렸다. 이 도시에서는 이틀을 머문다. 하루는 바이칼 호수를 위해 비워두었다. 관광할 것들이 많은 도시 같다. 그러나 가고 싶은 곳이 없다. 옷을 갈아입고 한식집을 검색한다. 내일 저녁엔 유라시아 횡단을 하는 다른 팀들과 만날 거다.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바이커들이 꾸준히 늘어가는 추세다. 몇 년 전만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시즌이 되면 주마다 10개 정도의 팀이 출발한단다. 우리가 출발한 7월 초는 조금 늦은 편이다. 6월 내내 몇십 개의 팀이 출발했다. 그중 우리보다 2주 먼저 출발한 친구들과 만난다. 빈티지 바이크로 출발한 어린 친구의 바이크가 터졌다는 소식에 밥이라도 한 끼 사주려 한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한참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고 가진 게 많은 형님, 누님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바이크 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도시에 한 달을 머물러야 한다는데, 그 사정을 알고 나니 마음이 쓰인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은 서로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 타보지 않고 그 무서운 것을 어떻게 도전하냐며 눈이 휘둥그레 지는 이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만나면 위로가 된다. 굳이 어렵게 바이크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어려움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이들이다.
오래된 친구와 말하지 않아도 좋은 그 느낌과 비슷하다. 서로의 바이크를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안전한 라이딩을 빌어준다. 어디서 왔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지금 여기, 내가 느끼는 것을 너도 알고 있다는 게 참 좋은 인연이다.
바이칼 호수는 이르추크츠에서 1시간이면 간다. 숙소에 짐을 다 풀고 내일은 가벼운 채로 소풍을 가기로 한다. 지나온 길들이 점점 쌓여 가야 할 길들보다 길어지는 순간이 언젠가는 올 텐데, 멀게만 느껴졌던 노보시비르스크, 점검을 위한 중간 지점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아쉽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온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 숙소에서 바라본 강은 한강에 비하면 아주 작다. 건너편의 기차역으로 열차들이 줄 지어 들어선다. 깜깜한 밤 사이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인다. 서울에 길들여진 나에게 아주 작은 도시,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에겐 가장 큰 도시일 것이다. 서울이 점점 잊혀 가는 기분이다. 내가 어디서 살아왔는지보다 지금 이곳이 정겨워지기 시작한다. 낯선 곳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도시의 밤이 깊어진다. 꿈속에서도 나는 요즘 바이크를 탄다. 눈을 뜨자마자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잠을 청하면서도 내일의 라이딩을 기대해본다. 라이더들의 꿈인 유라시아 횡단, 나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매일매일 숨 쉬는 것처럼 라이딩한다. 익숙한 내 바이크의 엔진 소리와 내 심장이 같이 뛴다.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싶어서 대단한 기록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달린다. 내일도 오늘처럼 달릴 거다. 라이더의 일상, 그 꿈에 가까운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그 의미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