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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Oct 11. 2017

나의 노래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유난히도 파랗던 하늘에 감동을 받았던 날의 라이딩의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흐린 기운이 스멀스멀 시작되다가도 금세 바람이 지나가며 공기가 바뀐다. 파랬던 하늘이 매일 반복되기를 내심 기대했었나 보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하늘의 변덕이 아쉽다. 분명 파랗고 더운 도시를 지나쳐왔는데 삼십 분을 달리자 구름이 저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의 하늘은 솔직하게 앞으로의 기분을 보여준다. 조금 이따 구름이 잔뜩 낀 저 산을 지나가게 될 거야. 비구름이 조만간 저 옆 마을에 내려앉을 거야.  저 구름은 거친 바람 때문에 만나지 못하겠구나.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라이딩을 했다면 그래서 대학을 다시 선택한다면 기상학자가 되고 싶을 정도이다. 이토록 경이로운 게 하늘이었다니. 나는 그동안 바빴던 걸까. 아님 그냥 무심했던 걸까.


오늘은 늦은 아침에 오랜만에 제대로 매트를 깔고 요가를 했다. 노란 머리의 러시아 언니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제법 큰 호텔의 피트니스라   현지인들이 가득이다.  문을 조금 열어놓고 넓은 피트니스룸에 혼자 요가를 시작하니 낯선 이곳이  금세 정겨웠다.  호흡에 맞춰 바람이 움직이고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굳은 몸이 서서히 열로 가득 차 오른다.  오랜만의 일상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낯선 곳에서 가장 최근의 내 일상을 재현해보니 알게 모르게 마음에 켜켜이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어제도 오늘 같은 날이었던 것만 같았다.  그런데 떠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달린 거리는 4,000km이다. 하루의 길이가 25 시간이었던 날들을 지나 오늘은 24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기로 한다.


늦게 시작된 라이딩에 기분이 좋다. 마치 백수로 노니던 서울의 어느 날, 강화도를 향하던 마음으로 달린다. 짐을 호텔에 풀고 한결 가벼운 바이크도 덩달아 날아갈 것만 같다.


시내를 나오자 공사 중인 진입로를 지나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육 차선이 넘는 큰 대로가 쭉 뻗어있다. 금세 진입로 구간을 벗어나자 익숙한 러시아의 보통 길이 나온다. 고개를 넘고 넘는 동안, 도로의 색이 회색과 갈색을 오간다. 여기저기 균열이 보이지만 심한 구멍은 없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드디어 바이칼 호수 입구가 나온다.  


기차를 타고 한 바퀴를 도는 코스도 있고 알흔 섬으로 들어가면 일박을 할 수도 있다. 다양한 관광코스도 있지만 우리는 그저 바이칼 호수에 손을 넣고 직접 눈 앞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늦은 아침에 시작된 라이딩은 점심이 되니 끝이 난다. 한 바퀴 쓰윽 둘러보고 자리를 잡는다. 돗자리를 깔고 흔하디 흔한 볶음밥과 샤슬식 꼬치, 빵 하나와 음료수 두 개까지 갖추니 모든 게 완벽하다.


바이칼 호수의 신비로운 모습과 우리의 뿌리일지도 모르다는 이야기가 겹쳐져 한껏 기대했다.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작은 파도가 해변에 부딪치고 끝이 없는 수평선 너머로  끓임 없이 움직이는 구름이 오가는 사이에 흐린 하늘은 어느새 파란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신화적인 이야기를 뒤로 하고 그저 자연경관으로만 바라봐도 거대한 호수는 바다 같아서 더 특별하다. 계곡물만큼이나 차가운 물은 미묘한 짠내를 내뿜는다. 사람들은 마치 해변가에 온 듯 한낮의 피크닉을 즐기고 커다란 페리선과 작은 모터보트들이 끓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시간이 한참 지난 줄 알고 시계를 쳐다봤더니 아직 온지 삼십분도 되지 않았다. 가만히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본다. 일분 일초가 느리다.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누군가는 촉박하게 틱톡거릴 것이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지금 여기여야만 한다. 내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꾸준히 최선을 다하면 닿을 수 있는 소박한 꿈을 만들어왔다. 처음부터 불가능하지 않았던 소박한 꿈이기에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이 오면 그 꿈이 손에 닿곤 했다. 그러나 달콤한 성취감과 동시에 찾아온 감정은 나를 묘하게 허탈하게 했다. 노력을 포장하고 목표를 한껏 소리 높여 외쳐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이런 것이었나. 대단한 것이라 치켜세울수록 얼마나 뒤돌아서면 작아지고 하찮아졌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손에 넣은 것을 금세 잊어버리고 비슷한 느낌의 새로운 꿈을 꾸었다. 그렇게 더 큰 꿈, 더 높은 목표, 또 다른 모델을 찾았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회사를 나오자 그렇게 멈췄다. 고작 그러한 것을, 크게 부풀려 꿈을 꾸었다.


그 목표와 전혀 다른 지금. 손에 닿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바로 지금. 나는 편안하다. 살짝 타버린 돼지고기와 날아다니는 볶음밥을 입속에서 우물거리며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을 관찰한다. 아마도 내가 일을 그만둔 지금이기에 , 사회 속에서 나를 만드는 일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은 후이기에 한없이 가벼울 수 있는 거겠지. 그 한없는 막연함과 가벼움이 점점 커진다. 저 구름 위로 보이지 않는 또다른 세상이 있듯이, 이 대책없는 지금이 보이지 않는 내일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여행 중인 나와  작년의 나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이라는 도돌이표는 그대로이다. 직장인이었던 나는 짝꿍과 함께 잠에서 깨어 출근을 하고 도시락을 먹고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의 나는 그저 어제처럼 일어나서 키를 꽂는다. 달리다 보면 배가 고파지고 어디선가 멈춰서 먹고, 싸고, 다시 키를 꽂는다.  새로운 숙소를 만나 단꿈을 꾸고 다시 눈을 뜨면 달리는 것은 그대로, 전혀 낯선 러시아의 어딘가에 도착해있다.

한낮의 파란 하늘이 바이칼 호수에 찾아오자 이윽고 우리는 자리를 접는다. 변화무쌍한 하늘에게 감사하다.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 파란 하늘을 다시 만난다.  보통의 하늘이 본래 이렇게 파랗던 것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곳에 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변화를 만들려면 떠나야 하는 건가 보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오래 전 아주 어렸던 내가 불렀던 노래가 입에서 툭 튀어나온다.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에 천사의 날개를 달고 돌아간다. 익숙한 태극기가 펄럭이는 조금은 서울과 닮아 있는 도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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