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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Sep 06. 2017

스로틀을 당겨!

직진 그리고 직진.

어쩌다 1,000km를 돌파한 하루가 지났다. 겁이 없어진 건지, 하룻사이에 엄청난 라이더로 거듭난 것인지 이제는 오직 앞으로 만을 외치기로 한다. 어제의 무리수가 그다지 체력에 타격이 없는 듯 아침이 밝아오기도 전에 짐을 휘르륵 다 싸버렸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다. 잠옷에서 라이딩복으로 갈아입고 세면도구를 다시 집어넣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가장 간단하지 않은 물건 몇 개를 빼면 말이다. 


우리에겐 여행에 거추장스러워도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좁은 방안을 가득 채운 향기, 따뜻한 물에 또르륵 내린 강한 커피이다. 그것도 오래도록 익숙해진 동네 커피숍의 콩을 갈아 내리니 잠시 눈을 감으면 보통 때와 다름없는 여느 날인 것만 같다.  그렇게 잠시 낯선 침대 머리맡에 앉아 쭈그리고 내린 커피를 들이켜면 정신이 맑아진다. 강한 카페인이 온몸이 두들기며 아침이라고, 다시 달리라고 말한다.


매일 저녁, 잠에 들기 전 내일의 목적지까지 이르는 길과 날씨를 찾는다. 하루 200~300km 가 대략 우리나라의 동서 길이 정도인데 그 양끝 도시의 날씨가 매일 다르듯이 출발지와 점심을 먹는 중간지역, 그리고 목적지인 숙소까지의 날씨는 매번 다르다. 오늘은 처음으로 우중 투어가 예상된다. 


비를 만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제주도 투어를 마치고 완도에서 전주로 향했던 날, 부슬비가 계속 내렸더랬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매끈한 도로와 다르다. 울퉁불퉁한 도로에 비가 거세게 내리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정도를 넘어 파져 있거나 끓겨 있는 경우가 있다. 걱정이 앞선다. 비가 오더라도 적당히 와야 할 텐데.

가끔 2차선의 넓은 도로를 만나기도 한다. 쭉 뻗은 도로의 끝이 저 앞에서 점으로 끝이 난다. 비가 오지 않은 채 흐린 날씨 그대로 하루가 끝나길 빌어본다. 본래의 계획은 하루에 500km였으나 이제는 900km로 바뀌었다. 오늘 오후부터 앞으로 이틀 동안 비 예보가 있다. 만일 오늘 이 거리를 달리지 않으면 꼼짝없이 길가의 모텔에서 이삼일을 더 보내야 한다. 비를 적게 맞고 오래 쉬는 것을 택했다. 오늘의 목적지에서 비 오는 이틀을 쉬며 재충전을 할 계획이다. 


삼일을 달리고 깨달은 것은 이곳이 진정 척박한 시베리아였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사라진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는 거친 대지, 그곳을 질주해서 최대한 빠른 시간에 가보기로 한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라이딩은 달라진다. 바이크에 최대한 몸을 붙여본다. 바람이 세차질수록 나는 몸을 낮춘다. 풍경을 오래도록 볼 순 없지만 헬멧 밖으로 파노라마 펼쳐진다. 순식간에 지나간다. 기억은 머리로 하는 거라지만 이번 여행은 몸이 기억한다. 거센 바람과 축축한 냄새,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대지의 향기까지.

가야 할 길이 한참이라 점심을 최대한 늦게 먹게 된다. 아침의 체력이 최대한 살아있을 때 당기기로 한다. 휴식은 길가에 서서 스낵을 꺼내 먹는 것이 전부이다. 이제 좀 속도를 붙여가게 된 나는 120km까지 속도를 높이게 된다. 평균 속도 100~110km로 적당히 달려본다. 그 조차도 내게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점점 흐려진다


간간히 휴식을 취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평지를 지나 산악지대로 들어선다. 주유 등이 곧 켜질 것 같다. 주유소가 분명 나타나야 하는데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지형들이 계속된다. 이 곳에 주유소가 과연 있을까? 불안감이 커져간다. 

이윽고 주유소가 나타난다. 간당간당하던 사이 나타난 주유소라 반갑다. 갑자기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모든 게 재래식이다. 처음으로 만나는 주유 장치도 오래된 티가 난다. 인적이 드문 곳인지 초반에 보았던 체인 주유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나라가 엄청나게 크다 보니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주유소인지라 인터넷도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드문드문 집들이 보이면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출발할 때쯤 작은 차가 주유하러 들어온다. 오늘은 유난히 차를 만나기 힘들다. 넓다는 것을 예상은 했지만 단 삼일 만에 이렇게 절절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에 비하면 나라는 사람, 이 작은 바이크에 올라탄 짧은 인생이 다인 나는 얼마나 하찮은지. 


바이크 여행이라면 멋진 풍경, 스피드, 역동적인 모험을 예상한다. 매일이 새롭고 들떠 있을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변하는 풍경은 맞지만 일정 속도로 달리는 동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삼일 내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생각은 이 길고 거대한 길 앞에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작고 별거 아닌 존재인가 였다. 


나는 얼마나 하찮은 사람인가. 별거 아닌 한 사람일 뿐인데 스스로를 얼마나 부풀리며 엄청난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소소한 것에 흥분하며 살았던가. 


거대한 자연 앞에 그냥 놓인다. 엔진 소리도 가끔 들리지 않는다. 음소거한 상태로 바람에 펄럭이는 내 몸과 그럼에도 앞으로 질주하는 바이크, 내 눈앞의 남편. 그렇게 두 사람이 달린다. 아주 별거 아닌 두 사람이.


저 앞의 먹구름이 보인다. 우비를 입어야겠다. 거침없이 몇 백 키로 앞까지 다 보이는 탓에 비가 올 것을 예측한다. 얼마나 오래 올진 모르지만 미리 입어놓기로 한다. 이윽고 우리 눈앞에 넓은 언덕들이 끝없이 펼쳐진 광야가 나타난다.

지도에서 보면 대략 이쯤이다.

짙은 회색 빛 하늘 아래 겹겹이 내려앉은 동산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언덕을 따라 난 길은 때로는 높아졌다 낮아지길 반복하다. 작은 물방울들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거칠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렇게 넓은 땅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떤 인공적인 흔적이 없어서 비어진 것처럼 보였던 그곳이 어느 순간 가득 차 보인다. 인간은 자연에게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존재일까. 그저 있는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모든 것을 바꿔 놓으니. 오늘의 날씨 덕에 회색의 거친 광야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삼십 분쯤 달리자 이제 갈색의 판잣집들로 가득 찬 동네가 나온다. 날씨 탓인지 안 그래도 허물어져 가는 것 같은데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언제부터 살았던 것일까. 나무로 만들어진 전봇대마저 우울해 보인다. 그러던 와중에 낯익은 자동차를 만난다. 어제부터 계속 주유소에서 길에서 만나기를 반복했던 차이다. 


잠시 멈추고 인사를 나눈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청년과 어린 소녀다. 어제, 주유소까지만 해도 혼자였던 것 같았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소녀가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걸 보고 태웠단다. 사이드 박스의 사탕과 젤리를 한 움큼 소녀에게 쥐어주었다. 너무나 좋아하는 그녀 앞에서 새삼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태어나는 순간 어느 정도 운명은 결정 난다. 금수저, 흙수저를 말하기에 앞서 나라에 따라 달라진다. 그녀가 불행할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나와는 많이 다른 인생을 살아가겠구나. 그뿐이다. 

보이는 곳마다 그저 엄청난 자연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척박할 수밖에. 도시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그래서 더 유혹적이다. 그러나 어차피 나는 지나가는 여행자이다. 살아보지 않고 그저 이렇게 쓰윽 지나갈 뿐, 나는 이 땅의 진짜 삶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내가 사는 곳, 서울에 비하면 한참은 낙후된 이 곳이다. 그 모자람을 누군가 풍요라 말할 것이고 진짜 사람 사는 것이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다시 달린다. 얼마 남지 않았다. 200km를 남기고 기분이 들뜬다. 오늘의 목적지는 치타, CHITA 나름 도시다. 고민하며 좋은 호텔도 예약했다. 방도 넓을 것이고 욕실에 욕조도 있을 것이다. 방금 지나온 거친 황야를 뒤로 한 채 내가 살던 곳과 비슷한 곳, 도시를 향해 달린다. 


다시 산악지대가 시작된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속도를 줄인다. 80km다. 자꾸 도착시간이 뒤로 밀린다. 8시나 돼서야 도착할 것 같다. 언제쯤 도시가 나타날지 예상이 되지 않는 산길이다. 우중 투어 중에는 아무것도 볼 여유가 없다. 흘러내리는 비를 손바닥으로 쓰윽 지워본다. 잠시 앞이 깨끗해졌다 다시 흐려진다. 


갑자기 차들이 멈춘다. 산악지대에 공사구간이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밀려온다. 나는 오프로드가 무섭다. 자갈밭도 무서운데 진흙밭은 처음이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 나의 거친 숨소리에 내가 놀란다. 한참 동안 우리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한 방향의 차를 일정 시간 보내고 다음 방향의 차를 보낸다. 공사구간 사이를 지나간다. 자갈길로 시작한 공사구간은 점점 진흙길로 변한다. 삼분쯤 달렸을까. 어디선가 흙바람이 불어 온다. 비와 합쳐져 엄청난 흙비가 바이크로 쏟아진다. 앞이 흐릿하다. 다시 한번 손목과 어깨의 힘을 뺀다. 나는 내 바이크를 믿기로 한다. 흔들릴지언정 나를 넘어뜨리진 않을 것이다. 한참 진흙을 지나 다시 자갈길이다. 이제 끝이 나나 보다. 다시 도로로 올라타야 하는데 턱이 높다. 숨을 참고 저 앞을 바라본다. 스로틀을 당긴다. 저절로 앞으로 나아간다. 눈 앞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당겨라. 그럼 알아서 바이크가 달릴 것이다. 


어제의 긴 주행보다 더 지친다.  이윽고 산 너머로 표지판이 보인다. 40km 남았다. 이십 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후두 룩 후두 룩 빗줄기가 굵어진다. 소나기 수준의 비가 계속된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에게 쉽게 도시를 내어주지 않는다. 비가 거세지자 어두워진다. 저 멀리 깜박이는 도시의 불에 의지하며 묵묵히 달려본다.


도시로 접어들자 교통지옥이 시작된다. 차도도 없고 신호도 없다. 눈치껏 끼어든다. 내비게이션이 보이지 않는다. 낯선 도로에서 미아가 될까 봐 두렵다. 겨우 7시다. 아직 밤이 되려면 한참인데 낯선 러시아의 도시의 저녁을 마주하자 겁이 덜컥 난다. 이제 겨우 주행거리 5,000을 갓 넘었는데 오늘 하루 라이딩을 무사히 마무리 짓는다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기로 한다. 


그렇게 내 고향 전주보다도 작은 도시, 치타에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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