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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Aug 31. 2017

어쩌다 1,000 km.

우연이 운명을 만든다.

아침 일찍 눈을 뜨게 된 건 오늘도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정해놓은 목표가 있기에 서두른다 해도 달라질 것 없지만 더 멀리 더 빨리 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러시아의 아침은 매일 출근하던 그 시절의 일정과 비슷하게 시작된다.


처음 직장에서 야근을 했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긴긴 시간을 설레며 보냈더랬다. 내가 드디어 직장인이 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뭔가 큰일을 한 것 같아 괜스레 더 쿨해지는 느낌이었다. 하루 8시간,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9시간이 정해진 일과였지만 항상 20시간 정도를 회사에서 보냈던 그때.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12시에 택시를 타고 돌아오던 바로 그때. 지금에 와서야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삽질을 하며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는지 후회막심이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이제 갓 직장인이 된 새내기였다. 열정이 솟아오르던 그때는 야근하던 밤공기가 그렇게 신선했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 열정이 생각나는 하루가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오늘의 라이딩은 그 새내기의 열정만큼 무모하고 겁 없는 시간이었다. 물론 시작은 아니었다. 천천히 500km만 가보자. 어제의 열악했던 숙소보다 좀 더 나은 잠자리를 찾는 것이 목표로 그저 딱 500km였다.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여관방 수준의 침대와 물이 새는 간이 샤워실, 그나마도 있는 게 어디냐고 위로를 해보았지만 잠을 설친 건 당연한 결과, 안전한 숙소라니 이마저도 감사하게 받아들이자 맘 속으로 수없이 다독였던 게 지난밤이었다. 그래도 이틀은 무리인지라 와이파이 안 잡히는 숙소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터넷의 버퍼링을 참아가며 근방의 숙소를 샅샅이 뒤졌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나는 아무런 정보를 찾지 않았다. 오로지 짝꿍님의 구글맵에 찍힌 루트 안에 무언가가 있겠거니 믿음이 있었다. 여행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나자 모든 경로와 주유소, 내일의 숙소, 점심식사 장소 등  그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다는 게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유소와 숙소를 내가 맡기로 한다. 앞서서 달리는 그는 그저 라이딩에 집중하고 주유소가 반경 200km 안에 있는지 얼마를 가서 하루를 쉬어갈지는 내가 찾아 알려주고 함께 결정하기로 한다.


여행에 대한 환상의 뒤엔 항상 고단함과 힘겨움이 숨어있다. 출발하자마자 애써 외면하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 부딪혔다. 그것마저도 여행을 떠나서야 알아차리며 이 여행을 내가 왜 왔지 매일 후회하지만, 끝이 난 후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바로 그 제일 힘들었던 날인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자꾸 오지로 사람들이 떠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제의 숙소를 보상받아야 했기에 제대로 된 샤워실과 리셉션이 있는 숙소가 간절했다.


오늘의 일정은 500km 의 어느 도시 안에 있는 별 세 개 반짜리 호텔까지이다. 구글 맵에 나오고 사진도 있는데 당최 그 지역의 위성사진은 줌인이 되지 않는다. 뭔가 미심쩍긴 하지만 후기도 달려있다. 오늘의 숙소를 향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여본다. 차고의 문을 열자 아침 햇살이라기엔 너무 환한 빛이 들어온다. 어제만큼 더울 것이라는 예상이 든다.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는 시간은 11시까지 일 듯하다.

빽빽한 나무 숲을 지나갈 때면 바람 곁에 차가운 공기가 묻어 나온다. 순간 훕, 숨을 참게 된다. 어제 한낮의 온도를 떠올려보면 아침과의 기온차가 꽤 심하다. 계속해서 나무 숲이 지나간다. 도로는 산을 향해 나있다. 어느새 올라갔다 싶으면 다음 산이 나타나고 내가 몇 개의 야트막한 산을 넘었는지 가물가물 해질 때쯤 주유소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만난 주유소와는 사뭇 다르다. 편의점도 실속 있고 총을 찬 경비아저씨가 친절하게 커피자판기를 알려준다. 아침을 거르고 출발한 우리는 쪼그리고 앉아 빵과 커피로 때운다. 이때까지는 뭔가 어제와 다른 세련된 주유소에 기뻤다. 게다가 산 꼭대기의 풍경이라니. 앞으로 계속 현대화된 곳이 나타날 거란 예상이 들었다. 아침 8시가 되지도 않은 시간이라 도로 공사를 하러 가는 인부들의 출근버스가 주유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도로는 아주 길다.  그 긴 길을 누가 관리할까 생각해보면 도로의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혹한의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버티기 힘든 도로는 곳곳이 파여 있다. 땜질을 해 놓은 구간은 그나마도 낫다. 이틀 동안의 도로 상태 중 최악은 땜질을 하기 위해 패인 도로를 네모로 파놓고 공사를 하지 않은 구간들이다. 자연스럽게 울퉁불퉁이 아니라 갑자기 뚝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요리조리 피하다 보면 반대편 차선을 넘기도 하고 때론 질끈 건널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인부들이 그 구간을 공사하러 가는 게 아닐까. 주황색의 공사복을 입은 건장한 러시아 청년들이다. 우리의 바이크를 보고 한 명이 건너와서 이리저리 살피며 관심을 표한다. 가방에서 젤리를 잔뜩 꺼내 그 두 손에 가득 채워준다. 한글로 선명한 봉지를 러시아 청년들이 웃으며 뜯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오늘 하루 얼마나 뜨거울지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나는 내가 오늘 하루를 얼마나 뜨겁게 달릴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주유를 마치고 다시 달린다. 두 대의 스크램블러는 바이크의 자체 무게도 다르고 라이더의 무게도 다르다. 게다가 짝꿍의 가방엔 정비 관련 물품들이 잔뜩 들어있다. 적어도 짝꿍의 바이크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내 것보다 70,80 kg 정도 더 나갈 것이다. 주유를 하고 200km 정도가 지나면 짝꿍의 바이크에 주유등이 들어온다. 내 것은 20km 정도 더 갈 수 있지만 동시에 풀로 채워 놓고 딱 그 정도에서 다시 주유를 한다.


한 시간 정도를 달려도 이래 저래 트럭도 만나고 도로가 열악하기도 하니 100km를 넘기가 어렵다. 차가 적은 이른 아침이고 아직은 기운도 아직 팔팔 하이 게 한 번에 200km 달려 다음 주유소에 도착한다. 시간은 10시 반, 점심때 맞춰서 목적지에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오후는 숙소에서 쉴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쉬지 않고 다시 달린다.


길게 뻗은 일자형 도로보다 산 위를 굽이굽이 돌아나간다. 어느새 제일 높은 위치에 올라갔다 싶으면 아래로 내가 가야 할 길과 산들이 펼쳐진다. 감당하지 못할 대지의 크기, 그 안에 놓인 도로, 그 길을 달리는 우리. 눈을 깜박이는 것도 아쉬울 만큼 일초, 이초 다른 풍경들이 지나간다.


오후 한 시가 넘어서자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단다. 저 멀리 도시가 보이는 것 같다.  대로에서 빠져나와 도시로 들어가는 도로로 들어선다. 그런데 뭔가 벽이 보인다. 하얗고 높은 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세련된 기차역도 나타난다. 입구를 찾아 머뭇거리는 사이 방금 우리를 앞질러 갔던 빨간 차가 나타났다. 그리곤 저 앞에서 우회전하더니 사라진다. 저기가 입구로구나. 따라갔더니 경비원들이 뭔가를 검사하고 통과시켜주고 있다. 그 뭔가가 없는 우리는 망했다. 경비원은 우리더러 러시아 정부에서 만든 허가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숙소에 전화를 걸어 혹시라도 다른 길이 있나 확인하려 했지만 영어를 못하는지 끓어버린다.


아. 망했다. 게다가 덥다. 다시 대로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에 잠시 멈춰본다. 도시의 입구에서 만난 이가 적어준 숙소와 검색으로 알아낸 200km 거리의 숙소가 있다. 선택은 일단 달려보고 하기로 한다.  트럭 운전사들이 머무르는 휴게소, 모텔쯤 될 것 같은 곳들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곳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다시 달려야 한다. 어쨌든 어딘가에선 멈추고 하루를 마무리해야 한다.  이때부터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윽고, 후보지인 곳에 도착한다. 시간은 오후 3시, 배가 고프지만 그것보다 와이파이가 고프다. 숙소를 고른 나도 검증에 실패한 짝꿍도 서로를 탓하지 않는다. 그럴 겨를이 없다. 이곳은 러시아, 어딘지 모르는 황량한 도로, 우리에겐 우리밖에 없다.


식당 겸 여관인 이 곳의 주차장에는 달랑 우리 바이크 두대뿐이다.  식당에서 서성이는 동안 두 명의 버스 운전사가 왔지만 뭔가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시원한 물과 간단한 만두를 먹으며 우리는 다시 선택 장애에 빠진다. 지금까지 온거리 700km, 시간은 오후 4시를 향하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러니까 300km 가면 확실히 숙소가 있다. 바로 내일 머물려고 했던 곳이다. 여기서 멈추고 하루를 보낼지 남은 시간 동안 다시 달릴지 선택해야 한다.


이 날 우리의 선택은 서쪽으로 노을과 함께 달리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아빠 차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갔다가 집에 돌아갈 때면 항상 달이 나를 따라온다고, 아빠 저 달이 왜 자꾸 우리를 따라오냐고 물었더랬다. 앞서 달리는 짝꿍에게 해가 우리를 자꾸 따라온다고, 빨갛고 크고 뜨거운 저 해가 우리를 따라온다고 말해본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기억이 떠오른다. 아빠, 엄마는 지금 어느 달과 어느 해를 보고 계실까.


나이 서른다섯, 엄마가 나를 낳고 동생을 낳고도 몇 년이 지났을 그 나이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냥 어린애다. 엄마의 딸은 아직 그냥 딸로서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부쩍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욕지거리만 해대는 모녀가 돼버렸다.


뜨겁게 지며 계속 따라오는 해 때문에 눈물이 났다.


그렇게 오늘은 1,050km를 달렸다. 나는 아직 5,000km 주행을 못했는데 그중에 1/5 이상을 오늘 하루에 해치웠다. 만약 처음부터 이 거기를 계산했다면 처음부터 힘들게 달렸을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이 달리게 된 우연 같은 운명을 만든 오늘이다. 그리고 이 하루 때문에 우리의 러시아 횡단은 매우 빨라지게 된다.


가끔 우리는 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접어드는 길이 있다. 그렇게 첫 직장인 되었던 시절, 그저 열정만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나의 젊음을 보냈던 때처럼. 미리 알았더라면 가지 않았을 길을, 미리 예측했더라면 다른 대안을 내었을 길을 그렇게 달렸다. 다시 이 날 같은 주행은 없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가 바로 이날이다.


백수가 되고 직장인으로서의 내 지난 시간을 후회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중얼거리다가도 그래도 직장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려보면 바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였던 그 시절이기에.  가장 기억하고 싶은 시절이기에.


러시아의 길은 길고, 거칠고, 황량하고, 무섭다. 하루 14시간, 긴 주행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선다. 숙소는 어제보다 더 열악하다. 공용 욕실 위에 화장실이 있는 기이한 구조에 방에는 창문이 없다. 그럼에도 기쁘다. 그 길고 거칠고 황량하고 무서운 도로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갈 곳을 만나서 활짝 웃게 된다.


남들이 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힘들고 긴 유라시아 횡단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렇게 잠시 쉬어가는 것만으로 웃게 되는 것, 열악하고 거칠더라고 그냥 활짝 웃게 되는 시간.


여행 3일째, 초보 라이더가 유라시아 횡단에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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