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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Nov 09. 2017

실업급여를 향한 시선.

나는 그 댓글들에 화가 난다.

세상에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먹고사는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되는 걸까.


나는 이미 실업급여를 알차게 받았다. 그래, 혜택 받은 사람이다. 며칠 전에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최대 150만 원까지 실업급여가 올랐다는 거다. 오! 뭔가 좋은 일이 틀림없다. 그리고 스크롤을 내려 댓글을 훑어보는데 대부분이 세금을 허튼데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일 년 일하고 일 년 논다며, 누군가는 열심히 일해서 세금 내는데 혜택도 못 받는다며 이런 쓸데없는 복지에 대한 하소연이 대부분이었다. 속에서 뭔가 끓어오른다. 댓글 하나하나 답을 달아주고 싶었다. 절대 쓸데없는 복지가 아님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사회의 일원임을, 일하지 않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낙오일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 걸까. 속은 부글거리지만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문득 이건 뭔가 세상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댓글을 다는 몇 백명의 사람이 있다는 건 근본적으로 우리의 사회적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함께 잘 사는 사회’‘내가 잘 사는 사회’는 매우 다르다. 모두가 바라는 건 내가 먼저 잘 살고 나서  다같이 함께 잘 사는 사회이다. 부자 만들어주겠다는 전 대통령의 슬로건에 너나 할 것없이 열광하던 때가 떠오른다. ‘부자’라는 단어는 ‘내가 잘 사는 사회’와 동의어이다. 부자가 많아지는 사회는 빈부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사회이다. 적당히 잘 산다는 개념이 집 한 채, 자동차 한 대, 적당한 취미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여유 비용과 은퇴 후 체면을 차릴 수 있을 정도의 저금이라 가정해보자. 그 개념을 넘어선 부자는 지금 세상에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혼자서 쌓아 올리기 힘들다. 그럼에도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할수만 있다면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써서라도 나만 돈을 벌고 싶다는 것이다. 욕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세상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배웠다.  그 평범하고 단순한 가치 앞에서 그 욕망은 당연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일하던 대기업에는 그 욕망을 교묘하게 실현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똑똑할수록 내가 잘 사는 사회를 위한 길을 더 잘 찾는다. 심지어 합법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는 그 다음이 된다.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좀 더 나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모든 것을 쉽게 얻는다면 태어난 순간부터 불평등하다. 모두에게 똑같은 조건이 주어져도 미래는 항상 더 잘난 놈, 뭐든지 하나라도 더 알고 깨우친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그래서 덜 똑똑한 사람들, 밀려나고 어딘가로 자꾸 떨어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적 장치, 복지가 기회를 주고, 용기를 주고, 적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 지원을 해야하는 것이다. 함께 잘 살자는 사회의 실현은 내가 앞서는 사이 뒤를 받쳐주는 사회구성원의 존재를 위한 당연한 사회적 제도이다.

누군 그만둘 줄 몰라서 일하는 알아? 이들은 게을러 빠진 데다 무임승차를 하려는 사회의 악이다.


자의적 백수, 때로는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한 시선이다. 줄 서기에서 끝에 몰린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선택한 것같지만 실제로는 떠밀려 낙오자의 대열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건 모두에게 해당된다. 피라미드 구조의 시스템에서는 모두 낙오자의 대열에 설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않을 뿐이다. 왜 그것을 단순한 무임승차라 표현하며 약해빠진 사람으로 매도하는 걸까. 모두가 각자의 사정을 가진채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단단하고 튼튼할 수 없다.  경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모든 곳에서 낙오자가 나타난다. 원치않아도 누군가는 낙오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합의를 하는 것이고 때로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함께라는 가치 아래 서로를 배려하는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에게 투표를 한다. 그것을 철저히 사회의 이해관계나 경제적 합리성의 선상에 놓고 보면 누군가는 계속적으로 남들보다 자신의 능력을 기부하는 것처럼 느낄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당신의 발 아래에서 지탱해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는 낙오자가 되어야 하는 시스템이 경쟁이니까.


어느 사회학자가 삼성에 대해 얘기하며 왜 삼성이 거대한 기업이 되었는지, 그 권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느냐 물었다. 답은 작은 가전제품 하나도 국산제품을 써야 한다며 집안 곳곳에 삼성의 제품을 들여놓은 한 명 한 명이란다. 우리의 불행은 그 한 명이 아닌 모두가 거부하지 않는 이상, 절대적인 힘을 휘두르는 대기업이 사회적인 기업으로 거듭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돈과 힘을 선사해준 이들도 평범한 한명이고, 그 돈과 힘을 움켜쥐는 이도 꼭대기의 한 명이다. 태어남부터 우리는 불평등의 선상에 놓여있다. 아직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시킬만한 능력이 없다. 단순하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논리로 접근하지 말고 일할 기회,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현실을 이해하려고 해보자. 혜택이라고 말하지만 평범한 이들이 받을 수 있는 국가의 지원이 몇가지나 있겠는가. 그마저도 충분치 않고 복잡한 관계 속에 받지 못하는 이들도 얼마나 많은가.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실업급여를 받아본 나는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때로는 일 년 일하고 일 년 쉬는 것이 철없어 보일 수도 있다. 다르게 바라보면 우리가 찾는 일자리의 대부분이 고작 일 년짜리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도 고용보험이라는 당연한 권리는 행사하지 못하고 개인사업자로 계약하고 퇴직금조차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 하다.


정말 쓸데없는 돈이 뭔지 아는가. 사회적 기업을 만든답시고 이리저리 긁어보은 전문가 집단에게 자문료를 갖다 바치거나 사회적 공공재산을 만든답시고 여가를 즐길 여유도 없는 시민들을 위한 체육관, 운동장, 공연장, 문화시설을 계획하고 지어내느라 갖다 바쳐지는 눈먼 돈이다. 나는 그 눈먼 돈을 가지고 기획하고 계획했었다. 정말 쓸데없는 사람들이 모여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나가는 혈세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건 눈먼 돈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돈이다. 속내를 모르는 평범한 지역주민들이 우리 동네에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여우같은 지역인사들은 자신에게 자문을 받으라 한다. 남이 쓰는 것보다 어떻게든 내게 도움이 되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실업급여와 유사한 제도는 내가 백수가 되지 않는 이상 도움이 될 리 없는 제도이고, 내가 백수가 되는 것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불행이니까 으레 나와 상관없는 제도가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당신에게 평생 직장이 있다고 믿는가.


큰 그림을 보라는 말을 한다. 큰 사회, 너와 내가 함께 적당히 살 수 있는 사회, 자라나면서 그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뺏긴 이들이 아마도 그런 댓글들을 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나 한 몸 건사하는 게 너무나 힘들고 지치고 그래서 쉰다는 것은 사치인 이들 말이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게 잠시 더 나은 직업(내가 평생 먹고 살 수 있고, 쉽게 지치지 않고,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열정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한, 잠시 쉬어감이다. 그 때, 실업급여가 얼마나 경제적, 정신적으로 위안이 되어주는지 재취업자들은 안다. 우리에게 여유가 사치가 된 게 슬프다. 남들의 일이 그냥 남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심으로 변한다.


댓글들에 화가 난다. 내가 9년 동안 넣은 세금이 어쩌면 그들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세금을 더 내더라도 더 많은 이가 내가 받은 당연한 권리를 누리기를 바란다. 내가 좀 더 작은 집에 살고, 차 없이 뚜벅이로 살지라도. 나는 이번 백수생활을 통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사회를 바라볼 수 있었다. 매우 슬프게도 아직 내 삶에 정확한 대책은 없다. 그러나 담담한 도전정신(대책없는 긍정적 마인드)과 명확한 현실감각(엄청난 절약정신)을 생각해보면 내가 버린 직장이 아깝지 않다.


여태껏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계획적으로 한 번은 받아보길 추천한다. 실업급여가 주는 불안함과 안도감의 교차, 결코 그 댓글들이 이야기하는 것만큼 속편하지만은 않은 그 느낌. 겪어본 백수는 안다. 고작 몇 달, 고작 몇 백, 그것이 내 평생을 이어갈 수 없음을. 결국 나는 다시 돈을 벌어야 하고 내가 받은 만큼 누군가를 위해 다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가 같이 만든 세금으로 같이 나눠쓰는 거야.


백수라고 모두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고용보험과 건강보험을 비롯한 4대 보험을 무조건 가입시켜주는 직장을 선택해야 한다. 때로는 고용주가 월급을 더 줄 테니 다르게 계약하자고 한다. 한 달에 몇십만 원 더 주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봐도 내가 손해다. 게다가 고용보험은 기간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4대 보험은 좋은 직장이 아니라 정상적인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정상적인 기업을 만나는게 얼마나 힘든지 해본 사람은 안다. 내가 뛰쳐나온 대기업이 그나마도 제대로 되있다. 물론 그 대기업 문화 아래에는 희생되어진 수많은 하청기업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누군가의 피고름을 빨아먹어야만 가능하다. 다들 그렇게 한다. 알면서도 우리가 외면할 뿐.


직장인은 항상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직을 계획하는 자라면 손들고 나오는 것에 부담이 없을 테지만 잠시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가 밀려들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스스로 퇴사하는 이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직장에서 이 사람을 자르거나 경영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마지막 선물을 해주지 않는 이상 힘들다. 작은 회사일 수록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마지막 유종의 미를 선물해주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실업급여의 조건을 맞추게끔 유도해야 한다. 물론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라 권고사직을 권한다면 좋겠지만 이럴 경우는 대부분 퇴직금을 제 때 못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망할 징조가 보인다면 권고사직은 무조건 일차, 이차에 나가는 게 맞다. 회사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애사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보험료를 매달 냈음에도 직장인이었을 때 4대 보험에 대한 내용을 전혀 몰랐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먼 얘기였기에 그냥 습관적으로 나가는 세금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보험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해서 들어놓는 것 아닌가. 내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얼마가 나가는지 그로 인한 나의 혜택은 무엇인지 상식선에서 한 번쯤은 들여다볼 것을 추천한다. 열심히 들여다봐도 내 눈앞에 닥치지 않는 이상 잘 모른다. 우리나라의 관공서의 홈페이지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다 한글이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우왕좌왕하다 놓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실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그저 생색내기에 불과한 이력서를 낸다고 이야기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워크넷의 일자리는 공기업부터 동네 식당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미 일을 해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조건이 분명하다. 아무리 많은 직장이 눈앞에 있어도 조건에 맞는 곳을 고르고 골라야 하고 그나마도 다시 선택을 당해야 재취업이 가능하다. 내가 있던 업계는 전문가 집단이라 스스로 자부하던 곳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알음알음 연줄을 통해 재취업을 한다. 워크넷을 통해, 이력서를 통해, 아무런 추천도 받지 않고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순수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순수한 희망사항이다.(공무원들이 매우 순수한거다.) 만약 실업급여를 받으며 재취업의 기회가 온다면 하루빨리 다시 직장에 들어가야 남은 실업급여의 반이라도 받을 수 있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보면 그저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퇴사를 하고 계획적으로 재취업을 하는게 쉽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각자의 상황에 맞춰 준비해 주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알지 않은가.


어떻게 쉴 것인지를 고민하고 다음 인생의 단계로 넘어가는 건 그나마도 용기와 결단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내가 고민할 때는 엄청난 일이다. 남 얘기가 되면 달라진다. 약간의 시기와 질투로 저 사람은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요즘 한가했나 봐였다. 숨은 뜻은 나는 바빠서 그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는 것이다. 회사 다니며 안 바쁜 사람 누가 있겠는가. 설사 그래 보인 다고 한들 그걸 면전에 대놓고 얘기하는 이는 예의를 잊은 것 아닌가. 그러나 그들에게 바빠서 결정 못한 게 아니라 아예 용기가 없었던 거 아니냐고, 당신은 회사에 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도 먼저 회사를 그만둔 선배들을 보며 비슷하게 부러웠던 적이 있었으니까.


실업급여를 손에 쥐고 담담히 웃고 있는 백수들의 속은 시커멓다. 박차고 나온 직장이든, 짤리고 나온 직장이든, 이미 엎지러운 물을 주워담을 수 없다. 그 대단한 용기를 응원해 달라. 다들 그러고 산다며 불편하게 튀어나온 못처럼 취급하지 말고, 망치로 대가리로 쳐서 굳이 꺽어서 다시 집어넣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뽑힐 수 있게 가만히 놔두자.


나는 안다.

인생을 걸고 세상에 뛰쳐나온 많은 이들이 먼저 고생해서 새로운 직업세계를 열어갈 이들임을.

회사에서 가만히 앉아서 세상이 변하길 기다리는 이야말로 나중에 그들이 바꿔놓은 세상에 무임승차할 것임을.

그렇게 화가 내보지만, 현실은 망망대해에 떠도는 갈 곳 없는 이가 바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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