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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Nov 07. 2017

겨울잠을 왜 자는지 알아?

봄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야 하기 때문이지.

얼어 죽기 딱 좋은 백수생활 1주년이 코앞에 다가왔다. 


나 자신에게 격려와 한숨을 동시에 보낸다. 이루고 싶던 그 모든 것을 다 해내지 못함으로써 게으름뱅이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입증했다. 세상에 노는 것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완벽한 직장인이라 절대 불안함에 놀지 못할 것이란 예상을 처참히 무너뜨리는 일 년이었다. 게다가 난 계획적이지 못했다. 스케줄에 관해선 절대 늦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전화기에 대고 악다구니를 써대던 이가 누구였던가. 프로답지 못하다며 협력업체를 압박하고 주제넘은 조언을 하던 나는 스스로에겐 이토록 관대한 이였다. 


오래간만에 일다운 일을 한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도합 오백만 원이 넘은 전자기기를 총동원해본다. 이토록 비싼 기계를 그동안 웹 서핑하고 브런치에 하고 싶은 말 하는 것에만 썼다니, 겉만 번지르르한 나의 장비병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마저도 내가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사치 일터, 끝까지 사과사랑을 유지하고 싶으나 오늘 공인인증서의 벽에 부딪히고 나니 참으로 처참하다. 집에는 윈도우 피씨 가 없다. 윈도우 피씨를 떠난지 = 회사를 떠난지 일 년이 다돼가고  조만간 또 한 번 모든 인증서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도 코앞에 닥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사랑 타령인 내가 문제인 걸로, 인증서를 이토록 사랑하는 관공서가 정답인 거로, 그냥 불편함을 조금 감수하기로 한다. 


그간 신나게 놀았던 일 년을 되새김질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돈 되는 일은 역시 아니다. 최대한 돈을 적게 쓰고 생산적인 일을 해보겠다는 도전이다. 초기 투자비용과 수지타산을 때려가며 안정적인 일을 찾고 싶은 건 모두의 마음이지만 그럴 거였으면 회사를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9년간의 직장생활을 통한 어중간한 프로근성 ( 이마저도 무너진 지 오래지만)과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장비병으로 인한 좋은 카메라, 비싼 태블릿, 작고 가벼운 노트북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백수생활의 기록을 발판 삼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면 비싸지 않게 남들에게 팔아먹을 수 있을까. 


나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앞서 지난 백수생활에 큰 도움이 되어준 국가의 지원 정책을 세심히 점검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오늘의 준비운동, 창업을 위한 겨울잠 자기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국가가 뭔가를 공짜로 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회사든, 개인이든 내가 움직이지 않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터넷에 자세히 설명된 글들도 허공 위에 떠도는 허울 좋은 이야기일 뿐이다. 막상 내게 부딪힌 일이 되고 나면 무엇하나 정답이 없다. 나라는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기록들과 자료들은 때론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안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난 일 년 중 가장 나를 쪼여왔던 것은 실업급여였다. 지금은 액수가 더 커진 것 같다만, 한 달에 백만 원 넘는 돈은 매우 크다. 한 번이라도 받지 못하는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를까 봐 육 개월 동안은 맘 졸이며 구직을 했다. 국가의 도움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이를 받지 못했을 때의 억울함을.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국가의 혜택을 어떤 것이라도 받아볼 생각이다. 


실업급여 다음으로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내일 배움 카드였다. 1년의 유예기간이 있는 재직자 내일 배움 카드(대기업 이직예정자)를 발급받아 자비부담금을 얼마 내긴 했지만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국가에서 제공하는 모든 배움은 제정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학원의 사정을 감수해야 한다. 분명 국가에서 내는 돈이 개인이 내는 돈과 가치는 같다. 금액에서는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원에서는 국가의 돈은 아주 작게 생각했다. 개인이 백만 원 내고 듣는 수업과 국가가 대주는 백만 원에 따라 재료비부터 수강생의 위치까지 많은 것들이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비슷한 처지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회사 밖의 세상 경험을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30대 전후로 실업한 상태의 여성들을 만나서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것, 그건 큰 위로였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조사하고 제대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기업의 발끝에 매달려있는 업계 최고의 연봉을 자랑하는 전 직장 덕분이다. 희망퇴직을 만들어 준 것, 위로금으로 여행자금과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 대기업에 대한 환상을 없애준 것, 배고픔보다 무기력함의 무서움을 알게 해 준 것까지. 손으로 꼽아보니 발까지 동원해야 할 판이다. 


이번 겨울은 내년의 봄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선언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동안 다른 직장으로 돌아가야 할지, 무한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빵조각을 작게 쪼개 하며 백수 놀이를 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을 해왔다. 말은 괴롭다지만 얼굴은 웃고 있다.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백수의 까마득한 어둠을 딛고 똑바로 서있는 동안 내가 얼마나 단단해지고, 행복해지는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말해도 자기만의 어려움과 고민은 가지고 있다. 직장인과 백수,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하는 사장님까지 모두 행복하지만 불행한 단면이 있다. 나는 직장인의 단면을 지나 백수의 시기에 서있다. 그리고 다음은 돈을 벌지 못하는 사장님이 될 것이다. 


나는 그동안 완벽한 보통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냥 그럭저럭 이 아니라 남들과 비교해서 다르지 않은 삶의 궤도에 들고자 고민하고 선택을 미루어왔다. 그러나 삶은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과 항상 다르게 흘러갔다. 대기업의 때에 불과한 어느 부서의 실장님이 되는 것도 그 평범함의 목표였다. 부모임이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결혼이란 테두리임을 선언하기 위한 쇼를 벌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그 누구도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전 직장의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그 친구는 나보다 일 년 먼저 회사를 나갔고 남편과 사무실을 차려 본인의 일을 잘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결대로 살아야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무, 유형의 상황들은 내가 가진 결대로 움직일 때, 제대로 돌아간다. 자기만족, 그로 인해 얻어지는 작은 행복은 억지로 노력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원해도 얻지 못하고, 원치 않아도 안아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는 건 이 모든 것이 내 삶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 탓할 이유가 없는 삶이라면 불행이 와도 담담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남은 백수의 시간, 이 겨울에 해야 할 일들을 차례대로 나열해보기로 한다. 


먼저 백수생활의 남은 골수를 빼먹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리고는 돈 못 버는 사장으로서의 탈출방법을 계획할 것이다.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친절하지 않은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를 뒤져봐야겠다.


모두가 앞으로 나가서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라고만 하지 누구도 나오는 문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사회가 책임져줘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공서는 사과 제품으로는 로그인조차 되지 않는 데다 법조문을 겁나 어렵게 설명하는데 천재적인 소실이 있으며 재야의 숨은 고수들인 블로거들은 글을 친절하나 진위가 분명하지 않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범하고 정직한 소시민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것에 대해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현실은 참 잔인하고 혹독하다. 그 담담한 이야기 앞에 영화 속 영국보다 우리의 현실이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더라. 나 역시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해 왔고 꼬박꼬박 보험료며 세금이며 다 냈지만  막상 고용센터의 창구 앞에서 무슨 심사받는 마냥 떨리는 마음으로 공손해졌다. 다소곳한 목소리로 갖가지 정부 정책에 관한 질문을 해댈 때도 마찬가지이다. 


겨울잠을 자고 나서 기지개를 펼 그 날을 기대한다. 망할 것이라는 당연한 예상이지만 그럼에도 참 즐겁다. 그 즐거움을 안고 하나씩 직장인이였을 때는 몰랐던 국가의 울타리를 파헤쳐 보련다. 얼마나 견고할지 기대보다는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지만 말이다.

봄이 와도 내겐 겨울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봄을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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