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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Dec 21. 2017

선배가 솔직하게 말해봐.

취업을 앞둔 후배와의 온도 차이

연말이다. 여기저기서 송년회가 열리고 있다. 세상이 어디로 가든 말든 누군가는 졸업을 하고, 사회인이 된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나의 그 시절은 마냥 즐거웠다. 9월에 합격을 받아 속 편하게 놀았다. 이제 와서 그 날이 떠오르는 건 오랜만에 만난 낯선 후배들과의 만남 때문이다.

“멘토들이 멘티들을 위해 좋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하염없이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테이블 위에 쪼르륵 앉아있다. 뉴스에서 보았던 롱 패딩을 입은 아이들이 눈에 띈다. 요즘 아이들이다. 회사를 다닐 때, 20대 후배들에게 언제부터인가 아가라는 호칭을 붙이곤 했다. 특별히 누군가를 부를 때가 아니라 ‘요즘 애들’이라는 말 대신 ‘아가들’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그 ‘아가들’이 되기 전 정말 ‘아가들’이다.


멘토랍시고 앉아있지만 나도 선배의 부르심을 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딱히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진 않다. 그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나의 ‘백수’라는 타이틀은 영 자리에 맞지 않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이들과의 나와의 나이차이는 10살 남짓, 그리고 내 주변의 선배들은 거기서 15살 남짓 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아가들 중에 그저 나이가 많은 아가일뿐이다. 나이 지긋하신 선배들은 그래도 나름대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후배들 앞에 서는데, 동네 구멍가게 같은 허가 방을 한다거나 조그마한 상업시설 위주의 인테리어 시공팀을 한다거나 하는 이들보단 한 때 이름 날렸던 오래된 설계사무실 사장이나 대기업 차장, 공기업 연구원, 지방 교수 정도는 돼줘야 하나보다.


태생은 같으나 이미 직장에서 떠난 몸에다 요즘은 백수 게이지가 최상급으로 올라가서 차마 후배들에게 이 쪽 업계가 괜찮다는 말을 하지 못하겠더라. 그 말을 삼키고 뭔가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한참을 우물쭈물 의례 하는 인사말이나 건네며 시간을 축냈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 옆 테이블에는 내가 5살 때 입학을 하신 선배님이 계셨다. 말을 가려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다가 ‘ 왜? 내가 무엇하러? ‘라는 반감이 솟구쳤다. 노예 본능과 수직적 위계에 대한 사고방식이 뒤범벅이 된 채 오랜 시간을 살았더니 이제 선배라는 존재마저도 내게 직장 상사 같이 느껴지는 건가 싶어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뭐하고 싶니?”

너무나 빤한 질문을 그냥 던져 보았다. 내가 졸업할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고 전 직장에 들어왔던 신입사원들을 계속 봐왔던 터라 대답은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의상 물어본다.

“공기업 가고 싶어요.”

“저는 작은 아뜰리에 들어가서 좀 배우고 싶어요.”

“자격증을 따서 제 이름으로 사무실을 차리고 싶어요.”

시간은 지났지만 졸업생의 사고방식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나 보다. 월급과 복지가 좋은 대기업, 공기업과 예술의 혼을 불사르고 뭔가 있어 보이는 아뜰리에 그리고 이도 저도 모르겠고 공부를 더하거나 유학을 하는 케이스이다. 전공이 전문직에 해당하는 건축설계라서 그 업종과 분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내가 졸업하던 시기와 비슷하다.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친구들은 그랬다.)

나름의 고민을 치열하게 하고 있겠지만 그들의 고민 앞에 서있자니 내 코가 석자라 딱히 좋은 얘기(열심히 해서 좋은 회사 들어가라. 어떤 스펙을 더 쌓아라. 필요하면 연락하라 등등)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내 이름표엔 전 직장의 이름이 ‘전)’이라는 꾸밈이 더해진 채 적혀있었다. 좋은 직장이 어떤 거더라. 내가 좋은 직장이면 좋은 건데, 지금 이 아이들의 생각에 가고 싶은 곳이 제일 좋은 직장일 텐데 거기에 감 놔라, 배 놔라는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나름 행사라고 발표 순서가 있었다. 시끌벅적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대기업에 다니시는 선배의 PT가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구성과 칼라이다.

디자인이 경쟁력이라고 말하는 대기업 건설 회사치고 제대로 된  PT를 하는 경우를 못 봤다. 쌍팔년도부터 계속되어온 고정된 레이아웃과 오 미터만 떨어져도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들, 저건 출력용도 아니고 발표용도 아니다. 그냥 구리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속으로만 외쳤을 것이다. 나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나 역시도 상사를 위한 발표 준비를 할 때 그 고정된 방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러나, 나는 백수지 않은가.

“정말 구리지 않니, 건설회사는 다 그런가 봐.”

아이들이 당황한다.

“그렇지만 저건 선배님이 작성 하시진 않았을 거야. 그냥 있던 걸 가져오셨겠지.”

어색한 침묵과 어색한 웃음, 다른 얘기를 꺼내야 할 타이밍이다.


결국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기로 했다. 업계의 돌고 도는 비리라든지, 학교 교육의 무책임함과 십 년째 변하지 않는 커리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개선되지 않은 노동착취 같은 것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정말 건축이 하고 싶니?”

“지금 너희들이 사회에 나와서 ‘건축’이라는 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얘기하는 건 너무 좁은 시야야. 물론 당장 좋은 회사 들어가서 몇 년 일하고 나와서 자기 사무실 차릴 수도 있고 특별한 어떤 일을 만들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런 일들은 이미 너희들의 선배,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도 하는 일이잖아. 제일 유명하다는 건축사무실 중 임금 제대로 주고 로비 안 하고 일할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되겠니. 분야를 넓게 보고, 한 가지 분야만 보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렴. 나도 일하다 보니까 가끔 후회되는 순간이 오거든.”

후배들이 나의 말에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그 대답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아, 내가 전 직장의 선배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분명 이 아이들과 그들은 세대차이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거지?

경제력과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는 시간,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결국은 한 가지라도 만족하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후배들의 선택지에 없단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다. 어쩌면 내가 말해준 업계의 속내를 이미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후배들과 얘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선배가 합류하신다. 그리고 내가 직장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를 다시 그 자리에서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건 이겨내야 해. 다들 그런 시기가 있지. 그리고 각자의 상황에서 입장이 있는 거니까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참고 노력하다 보면 곧 알게 될 거야.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꺼고......”

선배의 조언을 들으며 마음속에 다시금 하고 싶은 얘기들이 쌓인다. 차마 그분 앞에서 말하지 못했고 그냥 삼키고 말았다.

선배들과 나, 후배들은 같은 2018년을 맞이하지만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세대이다. 예전처럼 수직적으로 위계를 삼자면 위로 갈수록 대접을 받겠지만 지금은 돈과 명성으로 그 위계는 바뀐다. 그 누구라도 조건을 갖추면 더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돈과 명성을 쌓아놓은 지긋하신 분들이 대체적으로 대접을 받고 더 큰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강요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살아온 삶에 대해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분명 달라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변명을 하고 사회 탓을 한다는 것이다.

이겨내야 하는 게 아니라 가끔은 모두가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업계의 비리와 잘못된 구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정과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어느 정도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되돌리려면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내려놓고 뒷선으로 빠지고 새로운 구조를 마련하고 계속 정화할 수 있는 정직한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총대를 멜 것이고, 누가 가지고 있는 혜택을 내려놓을 것인가.

전문가 집단, 잘 차려입고 멋진 말만 늘어놓은 쿨한 사람들, 그 속에 진짜 모습을 선배들은 알고 있지 않은가.

후배들이 졸업을 하고 이 업계에 발을 들어놓고 겪는 모순적 상황을 나도 겪었다. 그리고 선배의 말처럼 이겨내려고, 참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모순적 상황을 후배들에게 똑같이 겪으라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아무리 알려준다 한들 알고 겪는다고 덜 힘든 거 아니다. 그 힘든 시간을 바꿀 힘은 결국 지금 업계를 지탱하고 있는 선배들과 우리세대들에게 있는데, 아직도 ‘우리도 다 겪었던 일이야’라는 말을 하다니.

적어도,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려면 선배들로서 앞으로 이 분야를 어떻게 변화시키도록 노력하겠다 라는 얘기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흔하디 흔한 자기 자랑 말고,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사회생활 노하우 말고, 진짜 선배다운 책임 있는 말을 기대한 건 나의 큰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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