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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Jan 19. 2018

여백의 시간, 공백의 불안

마음가짐을 다르게 할 때.

새로운 프로젝트를 이어가며 아직 티끌만큼 남은 국가의 지원(백수의 권리)을 누리고 있다. 그동안 낸 세금을 아깝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교육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교육을 받으며 가장 좋은 것은 현업의 프리랜서 겸 생태계를 잘 아는 이들이 나를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유학파에 거창한 타이틀이 주르륵 붙어있는 교수들이 아니라 진짜 그 일로 푼돈을 만지며 근근이 먹고 살아갈 정도로 자신의 프로의 세계를 구축한 진짜 고수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받았던 그 어떤 교육보다도 진심이 느껴지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자신의 편집증을 스스로 인정할 만큼 꼼꼼하고 체계적인 성격의 선생님은 때론 직설적이고 가끔 아이 같으며 매번 정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밝힌다. 그래서 당황스러운 날도 있지만 덕분에 주저하는 일도 질문을 삼키는 일도 없다.


전문적인 지식도 있고 가르치는 본인만의 노하우도 있는 데다 아직까지도 왕성하게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굳이 묻진 않았지만 친구 분들은 대부분 교수, 임원이 되어 이미 현업을 떠났을 것이다. 아직도 가장 최신으로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고 가장 싫어하는 건 있는 비효율적인 작업이다. 생생한 프로의 정신이 온몸에 흘러넘친다. 프리랜서이기에 자부심만으로 살아남은 건 아닐 것이다. 결국 나의 선생님은 능력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러 가지 디자인 방식과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다양한 비유가 나온다.


그 날은 백지처럼 하얀 바탕에 무언가를 자꾸 채워 넣으려는 우리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백을 만드세요. 공백이 아닌.


가득 무언가를 채워 넣고서도 모자라 이리저리 마우스를 돌리다가 멈칫! 동작 그만이 되었다.


나는 지금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씩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조금씩 늘기도 하지만 조금씩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들 때도 있다. 열정 넘치는 20대가 아니기에(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 웬만한 대박을 터트리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정중한 거절마저도 가끔은 감사하다.  답이 없는 것보다는 부정이 낫다.


공백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가장 가깝게 느꼈던 지인들의 복귀가 기억이 났다. 아이를 낳고 경력 단절을 겪은 여성들이 대부분 직장으로 돌아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순한 육아휴직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돌아오고 나서 직장에서 다시 자신감을 되찾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내가 지금의 휴식을 멈추고 그저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건 공백이 되는 게 아닐까. 공백을 메꾸기 위해 어쩌면 떠났던 그 때의 나날들보다 더 치열하게 직장인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을 여백으로 만들어 점 하나를 찍어본다. 어떻게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매일 궁리하고 고민하지만 열정이 없어지며 추진력도 없어졌는지 아주 조금씩 다져가는 중이다. 말로는 기대하지 않고 천천히 느리게 그리고 불편하게 살고 싶다 말하지만 심리적으로 지난날과의 간극이 크다. 갑질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가끔 이해될 정도니까.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사람에서 아주 하찮은 인물이 된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어딘가에 가서 주도권을 뒤흔들지 않으면 존재감이 사라질 것 만 같은 불안함.


불안하지 불행한 건 아니다.

중요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여백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들려오는 좀 더 빠른 길, 대박으로 가는 기회에 대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대박을 한다한들, 그다음은? 유행은 유행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또 다른 새로운 것에 낡은 것이 된다. 그리고 강한 자극과 신선함은 착각일 뿐, 모든 것은 기존의 것의 재탕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가 했던 '건축'안에서 이미 깨달았던 아니었나.


공백이 되지 않기를, 다시 한번 마음을 되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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