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역시 성공하고 싶다. 그러나 아주 작고 소소하게.
나는 둘째이다. 장손 다음으로 태어난 딸, 양념 딸. 지금 세대는 딸바보가 최고라지만, 아직은 대를 이어주고 제삿밥 차려주는 아들이 필수라고 믿는 사회이다. 어렸을 적엔 혼자서 많이 속상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환경 덕분에 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경쟁적이었고 뭐든 잘하고 싶어 했다.
한글을 다 읽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갔다. 오빠와 달리 나는 첫 등교 사진이 없다. 지금에서야 그 사진의 의미가 첫째의 삶을 얼마나 옮아 매고 있는지 알았지만 한 때는 참 서러웠다. 뭐든 스스로 알아서 잘했다.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결과가 다를 뿐. 나는 그 시스템에 참 적당한 사람이었다. 노력한 만큼 나쁘지 않은 결과를 받았으니, 그러는 사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부터 다른 이를 보는 기준까지도 줄세우기에 불과한 시스템에 의지했다. 등수를 매기거나 점수을 만들어내는 것, 합격과 불합격까지 모두 줄세우기부터 시작이다.
정규 교육 12년을 지나 대학 5년, 그 후 직장생활 9년까지 경쟁이 몸속 깊이 자리 잡았다. 뭐든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을 나무라지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순위를 매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순위가 붙지 않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손쉽게 광범위한 통계를 읽는다. 어느 분야에서든 1등이 누군지 쉽게 알아차린다. 신문에서도, 뉴스에서도 다루는 것 역시 영향력이 있는 이 내지는 큰 사회적 파장을 가지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건 광고이다.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내 분야 외의 것에 대해서 철저히 순응하는 소비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등으로 잘 팔리는 것들, 결국은 대기업이 손대는 것들이다. 남들이 다 산다는 것을 소비했다.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게 있어 경쟁자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상대사 외에는 없었다. 내 분야에서만큼은 어느 업체가 망하고 갑자기 뜨고 정도는 알았지만 그것도 메이저급의 세상이었다. 그 외에는 관심을 가져도 알 길이 없었다. 세상은 넓고 내게 직접적으로 연결되 있지 않은 것 외에는 발품을 팔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삶의 나머지 것들은 어땠을까. 메일로 다양한 전단지와 광고를 받았다. 가장 편하고 쉬운 길이다. 어렵게 회사에 들어갔다지만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월급을 받고 쉽게 소비를 하는 일상이 익숙해졌다. 가장 빠른 광고를 통해 경제적인 선택을 한다. 선택받는 것들은 항상 메이저급이다. 불편하고 귀찮은 작은 회사를 위한 소비를 하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업계 1위에 목을 매달았다. 아비를 아비라 말 못 하던 홍길동 시절부터 일감 몰아주기를 교묘하게 포장했고 언제나 매출이 높았다. 그리고 회사 사람들은 높은 연봉만큼이나 실체를 외면하고 그 1등에 자기 자신을 투영했다. 회사의 이름, 매출은 나의 이름, 능력이기도 했으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내게 주어진 이름과 능력을 상실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더 이상 나는 업계의 동향만을 살피며 살 수 없다. 설계비 10억짜리에 목을 매는 상사를 보며 이제 우리가 이렇게 작은 것까지 손대면 어떻하냐 얘기했던 나는 이제 1억짜리는커녕 한 달에 100만 원 넘게 나오는 실업급여가 소중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나의 지난 9년 동안 항상 누군가와 경쟁을 하고 먼저 높은 곳에 올라섰다고 무의식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나의 성장도 나의 세상도 아니었다.
나에게 1등이 다르게 보인다. 점수가 높은 것, 연봉이 높은 것, 합격률이 높은 학원, 무조건 성공하는 비즈니스를 가르쳐준다는 컨설턴트, SNS를 통해 매출을 높여준다는 광고회사까지, 회사에서 향하던 방향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목표를 향한 빠른 길, 쉬운 길로 안내해주고 있다. 그곳에는 적당히 바보가 아닌 수준까지 공부하고 먹고 살만큼의 돈만 벌면 되는, 크게 성공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월세 낼 정도로 회사를 운영하고 싶은 나같은 사람을 위한 길, 무수히 많은 이름모를 이들이 아닌 적당한 숫자의 소비자만을 필요로 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공유하는 마케팅은 없다. 적당히 돈 벌면 되요 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하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먹고 살고 싶어요 라는 말은 망하지만 않으면 되요 라느 말과 같다.
만화책과 영화에서 가끔 나오는 문장이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이기도 한데.
"질문이 잘못되었는데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있나."
본능적으로 그동안 살아온 것과 같은 1등을 원하면서 다르게 살겠다고 허울 좋은 소리를 해대니 모든 것들이 삐걱댄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것은 두리뭉실하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정도로 막연하다. 그 길로 가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내게 맞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쉽게 보인다면 다들 그렇게 살겠지.
순간 막막하다. 세상엔 좋은 직장, 좋은 학벌,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외의 중간, 혹은 중간보다 조금 아래의 경쟁력은 낙오자 내지는 패배자일 뿐이다. 내가 꿈꿨던 소소한 삶은 그중에서도 더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적당히 벌고 적당히 여유롭게라는 것은 ‘있는 사람들의 사치’ 일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걸까.
회망퇴직은 그나마도 나은 편, 권고사직이나 어쩔 수 없는 해고에 이른 사람들은 말 못 할 가슴의 상처까지 얻는다. 인터넷에서 퇴사에 관한 고민이 넘쳐나고 그에 따른 조언들과 성공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긍정적인 미래를 그려준다. 반대로 막상 나와보면 지옥이라며 월급쟁이의 안락함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더 많다. 왜냐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은 직장을 다닐 때만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백수에게 이룰 수 없는 꿈은 좌절을 가장 절절하게 느끼게 해준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보겠다고 집에서 꼼지락거렸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건 120쪽 사진집을 출판했다. 결과에 목이 마르고 한동안은 두근거림에 잠을 설쳤다. 그러나 내 가슴 벅찬 프로젝트는 아주 작고 소소한 데다 관심 갖는 이를 제외하고는 알지도 못한다. 인터넷의 바다에는 나 같은 이들이 넘쳐난다. 이미 자리를 잡고 비슷한 일감들을 수없이 해내고 있었다. 나는 햇병아리 축에도 못 든다. 실망감에 하루가 저물고 나면 다시 설렘이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모두 대박을 꿈꾼다. 나는 쪽박조차 꾸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울렁거린다.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나는 여전히 1등이 하고 싶다. 그저 순수하게 즐겁고 기쁘고 이로 인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성공해서 매스컴을 타고 싶고 잘 나간다는 작가 소리도 듣고 싶고 무엇보다 직장인 시절에 내가 갖고 있던 자부심을 다시 얻고 싶다.
내 가슴은 아주 소소한 성공을 말하지만 머리 속에는 적어도 얼마, 몇 명에게 인정받고 싶은 통계 속에 정해진 목표가 있다. 되는대로 벌고 알려진 대로 살아가고 싶다고 소리 내어 말하지만 처음으로 겪어보는 작은 세상이 낯설다. 이제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몇 백 명이나 되던 사람들과 얽히고 ‘갑’이라고 대우받으며 회사의 이름을 나 자신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지난날과 다르다. 백수의 일상은 아주 작은 반경을 그린다. 그 작은 반경이 내가 알고 있던 세상에 비해 너무 작아서 이러다 내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지 무섭다.
세상을 반대로 들여다 본다. 나 역시도 작은 사회, 아무도 알아보지 않는 평범한 사람을 위한 세상을 살고 있는가.
오늘도 나는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다. 핫하다는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선택했다는 영화를 보러 간다. 내 인생에 나 같은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서 나는 적당히 벌고 작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조차도 소소한 성공을 꿈꾸는 작은 기업들, 1인 출판사, 1인 기업, 스타트업, 자영업자들의 삶에 아주 조금밖에 걸쳐있지 않다. 어쩌면 전혀 없을지도.
이 아이러니한 꿈과 현실을 탓하지 말자. 이 또한 과정이려니, 어딘가로 흘러가다 보면 어설프게나마 자리를 잡지 않을까. 실패한다 해도 괜찮다. 무리해서 사놓은 집도 없고 먹여 살려야 할 아이도 없고 오토바이 외에는 재산이랄 것도 없으니 적어도 내가 가진 것 안에서 무너지는 것은 괜찮다.(아, 괜찮지 않으려나.)
장기 재취업자들이 늘었다는 뉴스를 읽는다. 그중에 많은 이들이 내가 지금 느끼고 직장인과 백수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직장인들이 기업의 가치와 크기를 자신의 가치와 크기로 투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 세계가 무너지고 아무 배경없이 날 것으로 자신의 세상을 구축하려할 때 이 전의 위상을 마음에서 떠나보내기가 어렵다. 누군가의 성공담을 듣고 나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자꾸만 자신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우울함의 늪에서 허우적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무능력한 자신이 미치도록 싫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인 걸. 지난날 내가 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매일 마음을 다잡는다. 그조차도 거창하지 않다. 어제보다 나아지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그만둔다. 퇴사를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지금껏 해오던 길과는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내게 1등과 성공에 대한 갈증이 이렇게 크게 자리잡은 존재인지 몰랐다.
가끔, 만약 내가 10년 후에 지금의 상황을 맞이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본다. 준비가 조금 더 잘 돼있어서 나을 수도 있고 반대로 심리적인 타격을 더 많이 받았을 수도 있다.
처음 성인이 되어 술을 자유롭게 마시던 날.
처음 여권을 들고 혼자서 여행을 떠났던 날.
처음 월급이라는 것을 받고 부모님께 송금을 했던 날.
처음 결혼을 하고 공식적으로 서로의 삶을 침범했던 날.
뭐든 처음이 제일 어렵고 힘든 법이다. 어리숙한 어린 시절엔 자존심이라도 낮아서 뭐든 열정으로 감수했는데 이제는 열정 따윈 개나 주라지, 내게 남은 건 현실적 감각과 꼴에 단단한 자존심이다. 집에서 멍 때리고 있노라면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헷갈리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있다니.
희망퇴직한 백수의 고민은 너무나도 철이 없어서 다시 대학생 때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오히려 속이 편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다행이다. 몸과 마음이 젊어진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