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 않으면 죽는 토끼> 1부 1화.
수요일 오후 4시 40분.
경영지원본부 가장 안쪽 회계팀 분위기는 사막처럼 건조했다.
퇴근만 기다리는 8인의 팀원들은 조용히 마우스만 클릭했다. 사막 위를 걷는 낙타처럼 느릿느릿한 속도로.
키보드 소리가 이렇게 오래 들리지 않는다는 건, 대충 이들이 쉬고 있다는 뜻이다.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육아 용품을 뒤적이는 과장님, 모니터 아래 핸드폰을 숨기고 모바일 게임에 몰두한 대리님. 어제까지 숨가쁘게 월마감을 마친 터라 저마다 오늘은 무조건 칼퇴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오늘 저녁에 다들 시간되나?”
적막을 깬 건 지압 슬리퍼를 신고 검은색 바람막이를 걸친 부장님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부장님 얼굴은 이미 취한듯 검붉은 빛을 띄었다. 주6일 술 약속이 있는 마당발 부장님, 오늘 스케줄이 비었다는 의미다.
팀 막내 토끼의 귀가 쫑긋했다.
2곱하기 5 총 10개가 연결된 자리에서 가장 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 토끼는 속으로 외쳤다.
'설마 회식인건가? 비상이다!'
‘오늘도 못 달리면… 진짜 큰일나는데 어쩌지.’
토끼는 초조한 마음에 메신저를 켰다. 기획팀 동기에게 쪽지를 썼다.
'오늘 갑자기 회식한대. 핑계 없을까? 살려줘.'
토끼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우스를 몇 번 툭툭 눌렀다. 애꿎은 전자결제 시스템도 괜히 켜봤다. 새로 들어온 전표는 없었다. 다시 보니 동기의 상태 표시줄은 <회의 중>.
메신저는 끝내 울리지 않았다.
“이번 주 다들 고생 많았다."
회사 근방의 고깃집에선 삼겹살이 노릇노릇 익어갔다.
술잔이 부딪치며 분위기 좋게 밤도 익어갔다. 여자 대리님들은 육아를 핑계로 모두 도망쳤다.
토끼는 4시 40분부터 퇴근할 때까지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지 못한 죄로 꼼짝없이 붙잡혔다.
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부장님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자리.
일단 버텨보기로 했다.
"오늘같은 날은 달려야지.”
부장님의 시선이 곧바로 맞은 편에 앉은 토끼의 잔으로 향했다.
토끼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소맥이 담긴 잔을 비웠다.
‘달리긴요, 지금 제발 진짜 달리게만 해주세요.’
'삼겹살 좋고 소맥도 좋고 회식도 그렇다고 쳐요. 근데 저 오늘도 달리기를 못 하면 진짜로 죽는다니까요.'
토끼의 잔이 곧바로 채워졌다. 토끼도 부장님 잔을 채웠다.
그 때였다. 토끼가 신은 검은 색 호카 운동화 속에서 가벼운 진동이 울렸다.
발바닥에 심어진 동력장치가 보내는 경고다! 지구 시간으로 72시간 이상 동력 비가동 상태가 되면 동력장치는 꺼진다.
동력장치가 꺼지면,
호흡 저하 → 체온 저하 → 심박 정지
즉, 생존 불가.
토끼는 동력장치와 연동된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 동력 비가동 시간 69시간 42분 경과
⚠ 잔여 생존 가능 시간 2시간 18분
…이제는 도망쳐야 한다.
‘그저께도, 어제도 야근하느라 못 뛰었는데... 더 이상은 위험해!’
생존의 위협을 느낀 토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부장님, 저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요. 다음엔 꼭 끝까지 남겠습니다!"
모두가 정지된 화면처럼 토끼를 쳐다 봤다.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갑작스런 변명을 모두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토끼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쫓기듯 일어서 인사를 했다.
"토끼랑 술 한 잔 마시기 힘드네. 그래 고생했어~ 들어가"
못마땅한 과장님의 목소리가 뒤에서 스쳤다.
가게를 나오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밤의 도심은 꽤나 붐볐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틈.
토끼는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한쪽 어깨에 겨우 백팩을 걸친 채로.
‘살아야 해! 무조건 뛰어야 살아!’
달에서 온 토끼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려야만 살아남는 몸을 갖게 되었다.
조금씩 숨이 차오르고 눈가는 뜨거워졌다.
그래.
나는 뛰지 않으면 죽는 토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