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도 없이 시작된 그날, 서브 4를 해버렸다(4)

K군은 떠났지만, 레이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by 다독다독

목표 없이 레이스를 즐기니 기분이 좋았다. 상쾌했다. 유쾌했다.

얼마나 좋았냐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초면인 주자에게 "코스가 너무 예뻐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땐 꼬불꼬불 나무 데크로 이어진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날 때였다. 울산이 고향인 친구가 태화강 마라톤을 홍보하면서 '코스가 정말 아름답다'라고 한 건 빈 말이 아니었다.


여유가 있으니 주변 풍경도, 사람들도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30만원이 훌쩍 넘는 A사 최신형 러닝화를 신은 주자가 있었다. 대충 봐도 고가의 아이템을 여기저기 걸치고 있었다. 그 주자는 빠르지 않았지만 내가 자신을 추월하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않았다. 발 길이 닿는 대로 뛰다가 혹여나 내가 그를 앞지를 때면 어김없이 나보다 앞으로 튀어나왔다.

"저러면 빨리 지칠 텐데..."

기분 탓인가 싶어 몇 번 더 그를 앞질러 봤다. 그는 분명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를 모른 척하면서도 은근히 이기려고 하는 그런 신경전이었다.

"내가 저 사람은 이긴다..."

추월을 포기하고 '원기옥'을 모으는 전략으로 바꿨다. 키가 160cm에 불과한 나와 달리 그 남자는 키도, 체구도 컸다.

어쩔 수 없이 그의 화려한 등판 무늬를 바라보면서 최면에 걸리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등판 무늬를 일명 '땡땡이' 작품으로 유명한 야오이 쿠사마 작품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움직이는 땡땡이에 홀린 듯 뛰다 보니 어느덧 거리도 1km씩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었다.


10K 지점이 가까워지자 하프코스 주자들이 나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중엔 아는 얼굴도 있었고, 아주 짧은 인사나 응원을 주고받았다. 그 한 마디가 꽤나 반가웠다.

규모가 크지 않은 대회라 주로는 한적했다. 대신 응원단도 없다는 점은 감내해야 했다. 레이스가 외로워질 때면 고개를 돌려 벚꽃나무, 이름 모를 연두잎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때론 저 멀리 물 위에 떠 있는 오리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도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인지 초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아픈 곳도 없었다.


코스는 대부분 평지였지만, 첫 번째 반환점인 다리를 건너기 위해 흙으로 된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다리 위에 K군이 보였다.

그가 풍경을 보는 건지 레이스를 즐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치지 않았고 의욕도 불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5분 40초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속도는 사실 42.195km를 4시간 이내 주파하기 위한, 즉 서브 4를 위한 기준이다. 일반적으로 서브 4가 목표라면 후반부 체력 저하에 대비해 이보다 조금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안전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이 속도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선가 "'일말의 '희망'마저 놓을 필요는 없잖아?"라는 조언을 새기고 있었다.


다음은 논두렁 밭두렁 코스가 나왔다. 어느덧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도 지나가고 그늘 하나 없는 길이 이어졌다. 이 코스는 주자들의 첫 번째 고비였다. 두리번 거려보니 어느새 쿠사마 야오이 등판의 주자는 사라진 뒤였다.

바로 이 논두렁 밭두렁 코스에서 우연히 '귀인'을 만난 건 생각할수록 정말 신기한 일이다.

거리로는 대충 12km 정도 지났을 때. 내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훅하고 들어왔다.

"오늘 목표가 어떻게 되세요?"

고개를 돌리니, 형광 주황 싱글렛을 입은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크지 않은 키, 가벼운 발걸음, 유쾌한 표정. 그의 옷에는 <달리는 사람들>이 적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그 만남이 내 레이스를 완전히 바꿔놓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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