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자고 싶은 러너를 깨운 새 러닝복
숙소에서 대회장까지는 차로 10분여 거리였다. K군은 여유로웠다.
"우리 7시 30분쯤 출발할까?"
'보통 풀코스를 뛰면 2시간 전쯤 대회장에 도착해야 하지 않나. 대회 시작은 9시인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내 "그러면 되겠지?"라고 대답했다.
이미 대회를 잘 뛰겠다는 의욕이 없는 데다 '경력직' K군을 믿어보자는 대답이었다.
출발까진 시간이 꽤 남았다.
전날 밤 옥수수 캔까지 먹어 놨더니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지만, 설령 뛰다가 배라도 고파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소고기죽을 뜯었다. 보통 대회 3시간 전에 식사를 마치라고 한다. 그러니 일단 넣어두는 수밖에 없다. 소고기죽을 입 안 가득 삼키면서도 졸음이 쏟아졌다. 밤새 뒤척이다, 두세 시간 정도 잤을까.
새 러닝복을 꺼냈다. 날씨 좋은 어느 날 성수동 플리마켓에 놀러 갔다가 무려 12만원을 주고 산 옷이다. 대회 일주일 전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질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기에 거금을 투자했다. 백지장처럼 얇고 하늘거리는 싱글렛과 바지 세트였다. 착장만 보면 이건 뭐 서브 3 주자도 부럽지 않았다.
(후아아아아암)
"아무래도 더 자는 게 맞는 것 같아"
차 안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의 K군과 달리 나는 밀려드는 잠에 괴로웠다.
어느덧 대회장 근처 주차장에 들어섰다. 참가자는 약 5000명. 크지 않은 규모였다. 곳곳엔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푸는 참가자들이 보였다. 나른했던 차 안과 달리 바깥공기는 선선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사실 대회를 뛸지 말지 무게 추는 5대 5를 왔다 갔다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심장이 조금씩 요동쳤다.
러닝 크루 친구들이 모여있는 부스에 달려가 인사를 나눴다. 모두 각자 스케줄에 맞춰 전날, 혹은 이날 새벽 서울에서 내려와 이곳에 모였다.
울산이 고향인 친구가 특히 밝아 보였다. 그는 평소에도 서울말이고 싶은 욕심이 잔뜩 담긴 누가 봐도 사투리인 울산 말을 썼는데 이날은 그의 억양은 유독 팔딱팔딱 뛰었다.
"왔나!"
대회를 뛰자는 쪽의 무게추가 어느새 8까지 올라섰다.
주위에서 열정적으로 몸을 푸는 러너들을 보며 덩달아 심장이 두근댔다. 이내 러닝화를 갈아 신고 소지품을 보관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8시 20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른 잔디밭 한 켠으로 달려가 <달리기 전에 하면 좋은 10분 스트레칭> 영상을 틀었다. 다음엔 주위를 2km 정도 돌면서 가볍게 웜업 러닝을 진행했다.
이제 물러날 곳은 없었다. 거기다 12만원에 팔려온 새 러닝복은 주인 속사정도 모른 채 두근대고 있었다.
"아 여기는 싱글렛, 싱글렛. 보고 드립니다! 주인님과 함께 첫 풀코스 뛸 준비 끝! 믿고 맡겨 주십쇼."
쿵짝쿵짝.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흥을 돋우는 음악과 사회자의 멘트. 레이스는 9시 정각에 시작됐다.
기대 없이 발을 내디딘 주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한 3월 말, 울산 태화강은 이미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했다. 널찍하게 펼쳐진 강가를 따라 갈대 같은 것들이 바람에 실려 춤을 췄다. 오리와 철새들도 물 위를 떠다녔다. 파란색과 흰색 물감을 적당히 휘휘 섞다 만듯 옅은 구름 낀 하늘이 여유로운 풍경을 완성했다.
나와 K군은 나란히 1km 지점을 뛰고 있었다. 레이스 전 K군은 내게 여러 번 물었었다. 레이스를 같이 뛸 건지 각자 페이스대로 뛸 건지. 전반부는 K군이, 후반부는 내가 끌어주는 전략을 세우기도 했다. 평소 나보다 잘 뛰면서 후반부만 가면 퍼져버리는 바람에 아직 서브 4를 하지 못한 K군과 컨디션 난조로 완주 여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나. 사실 우리가 같이 뛰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1.5km 지점을 지날 즈음 그동안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K군은 앞으로 치고 나갔다.
시계를 보니 내 페이스는 5분 38초. 그는 이보다 조금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애초에 서브 4 욕심이 없는 나의 달리 그는 의욕이 넘쳤다.
저러다 오버 페이스하면 어쩌나 싶어서 "풍경 보며 달려!"라고 외쳤다.
그는 조금의 요동도 없었다. 흐린 눈을 하고 들여다보면 멀어지는 그의 등판에 '서브 4'라고 쓰여있는 거 같기도 했다. 아무튼 K군은 힘차게 앞으로 뻗어 갔다.
"잘 가 친구야. 이 번엔 꼭 서브 4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열심히 따라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