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못 뛰어도 '카보로딩'은 해야지
울산은 생각보다 먼 도시였다. 내가 운전대를 잡은 것도 아닌데 지쳐버리는 기분. 밀린 수다를 좀 떨다가 졸음이 쏟아졌지만 모름지기 조수석은 운전자를 깨우는 게 책임인 법. 신나는 팝송부터 90년대 인기가요까지 계속해 플레이리스트를 바꿨고 생각나는 음악은 싹 다 틀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이천 쌀 휴게소, 문경 휴게소를 들러 두 번이나 쉬었다. 서브 4를 하겠다고 연차까지 써서 울산까지 손수 차를 운전해가고 있는 K군이나 그 옆에서 졸음을 참으며 실려가고 있는 나나 둘 다 참 대단한 의지다 싶었다.
울산에 도착하자마자 설렁탕부터 먹었다. 며칠 굶은 거렁뱅이처럼 허겁지겁. 원래는 근처 백화점에서 열리는 러닝 팝업 스토어를 들르고 또 시간이 남으면 관광 명소도 둘러볼까 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울산에 거의 다와갈 즈음 K군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밥부터 먹자."
뜨끈한 국물이 영혼을 데워주는 기분이었다. 배고픈 두 영혼이 그릇에 코를 박고 국물을 졸이자 넉넉한 울산 인심의 사장님이 국물도 추가해주셨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저희 서울에서 왔는데 너무 맛있어요."
K군은 요즘 누가 서울에서 왔다고 말하냐며, 촌스럽다고 면박을 줬다.
마라토너들은 보통 대회 일주일 전, ‘카보로딩’이란 작업을 한다. 대단한 기록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이 과정을 빼놓으면 왠지 섭섭하다. 카보로딩은 42.195km의 장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몸 안에 탄수화물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작업이다. 보통 대회 3~4일 전까지는 고단백 위주의 식사를 하고, 대회 하루 전까지는 고탄수화물 식사를 한다.
설렁탕 한 그릇과 그 안에 든 옥수수면 사리, 밥 한 공기까지 싹 비웠는데도 불안했다. 뛰다가 에너지가 고갈되면 어쩌나... 결국 호텔에 체크인하자마자 다시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옥수수캔과 포카리스웨트를 양손에 들고 로비로 돌아왔는데, K군이 우비를 깜빡했다고 해 다시 편의점으로 갔다.
“기왕 편의점까지 온 거, 옥수수나 먹고 갈까?”
“근데 이렇게 배부른데 옥수수가 들어갈까?”
신기하게도 설렁탕과 밥, 옥수수면으로 가득 찬 뱃속에 옥수수 한 알 한 알이 쏙쏙 들어갔다.
옥수수 반 캔과 포카리스웨트 반 병을 해치운 K군은 비장한 표정으로 커다란 매트와 폼롤러를 꺼내 들었다. 잠들기 전까지 온 몸을 풀고 잘거라며 그것들을 이고 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푹 쉬고 내일 봐~”
혼자 들어선 낯선 호텔 방. 내일 입을 옷을 꺼내 놓는데 뭔가 석연치 않다. 낯선 울산에서, 응원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인생 두 번째 풀코스 마라톤을 뛸 생각을 하니 썩 내키지 않는 마음도 든다.
그러고 보니, 나 허리는 괜찮은 건가. 뛰다가 ‘그 날’이라도 시작되는 참사는 없어야 할 텐데. 그냥 응원만 할까? 테이블 한 켠에는 마그네슘, 파워젤, 진통제, 피임약까지 각종 약들이 즐비했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 심란하다.
호텔방은 쓸데없이 널찍했다. 방 안 소음들이 잦아들고 내 숨소리만 남자, 그제야 바깥의 소리들이 창문을 타고 스며들었다. 환풍기인지 윙윙거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희미한 자동차 소리. 더블베드 위에 놓인 베개 네 개를 하나씩 다 시도해봤다. 가로로도, 세로로도 누워봤고, 시계 바늘처럼 한 바퀴를 돌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다. 숙면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컨디션인데. 핸드폰 불빛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심란하고 심심한 마음을 달래려 몇 번이고 폰을 켰다. 쓸 데 없는 릴스, 친구들의 스토리, 쓰레드… 그런 것들을 훑다가, 새벽 느즈막히 겨우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개운한 느낌은 1도 들지 않았다.
"오늘은 망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