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도 없이 시작된 그날, 서브 4를 해버렸다(1)

허리도, 이빨도, 우주도 말리는데 기어이 풀코스를 뛰겠다고?

by 다독다독

맹세컨대, 나는 그날 절대 서브4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 흔한 레디샷조차 찍지 않았을 정도니 정말 별생각이 없었다. 사실 출전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떻게 서브4를 할 수 있었냐고?


대회를 일주일 남긴 시점,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탈 없던 허리에 갑작스러운 통증이 생겼다.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아 벼락치기로 코어 운동을 과격하게 한 게 원인이었지 싶다. 숨통을 틔운답시고 친구들과 오르막길을 전력 질주한 것도 한몫했다. 친구가 제안한 '4분 30초' 페이스.

나도 할 수 있나?! 우다다다... 아니구나, 할 수 없네. 오르막길을 오르다 말고 허리를 삐끗한 느낌이 들어 즉각 달리기를 멈췄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붕어빵이랑 떡볶이는 빠짐없이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허리를 제대로 펴기도 힘들어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아니라고 했다. 물리치료와 약 처방으로 급한 불을 껐다.

하필 그날 저녁엔 워터픽을 사용하다 이빨이 깨졌다. 이 정도면 온 우주가 대회 출전을 막는 거 아니야? 의심이 들 정도의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치과에 누워 있는데, 그냥 이 상황이 웃겼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달력을 바라보다 '아이코!' 여자라면 한 달에 한 번씩 겪는 고통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정일이 정확히 풀코스 출전일과 겹쳤다. 며칠 전 마그네슘과 피로회복제를 사러 갔던 약국으로 서둘러 달려가 "피임약 주세요"라고 말해야 했다. 그마저도 날짜가 이미 임박해 확실한 방편은 아니었다.


대회를 깔끔하게 포기할지, 아니면 출발이라도 해볼지. 고민의 기로에서 나는 결국 ‘하늘에 맡겨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1월과 3월 달리기 마일리지는 각각 120km, 100km 정도로 부족했지만, 2월엔 거의 200km를 채웠다. 느린 조깅이 대부분이었지만 마일리지만큼은 차곡차곡 쌓아왔다. 첫 번째 풀코스를 4시간 안에 완주한 경험도 있다.

작년 11월 JTBC 마라톤에서 3시간 54분이라는 여유 있는 기록으로 서브4를 해낸 기억. 물론 그때에 비해 이번엔 몸무게가 3~4kg 정도 늘었지만, 허리를 제외하면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빨리 달리지 않고 높은 케이던스를 유지하는 습관 덕분에 큰 부상 없이 달려올 수 있었다.


대회가 열리는 곳은 머나 먼 울산이었다. 대한민국 남동부의 광역시. 경계선을 경상북도 양산시와 부산광역시와 맞대고 있는 도시. 서울에서 차로 출발하면 꼬박 서너 시간을 달려야 했다.

원정을 가게 된 사연은 간단하다. 상반기 풀코스 계획을 세웠을 땐 이미 웬만한 메이저 대회 티켓이 모두 동난 뒤였다. 마라톤 인기가 치솟으면서 티켓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그러던 중 고향이 울산인 친구의 제안으로 울산 태화강 마라톤을 알게 됐고 다 같이 놀러 갈 겸 대회를 신청했다.


대회 하루 전날인 금요일. 긴 여정을 함께 할 K군을 만났다. 동네에서 맥도널드 런치 세트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고 7만 킬로를 뛴 하얀색 스포티지에 몸을 실었다.

K군은 러닝크루에서 만나 함께 뛰는 친구다. 서로 집이 가까워 자연스레 친해졌고, 나보다 러닝 경력도 길고 기록도 좋다. 평소엔 잘만 달리다가도 대회만 나가면 이상하게 쥐가 나서 아직 서브 4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가 울산까지 가서 풀을 뛰게 된 사연도 거기 있었다. 상반기 안에 서브 4를 끝내겠단 비장한 각오. 그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운전대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