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2/21~5/8)
2021년 말부터 미술관들이 굵직한 거장의 전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위축되었던 해외 작가의 전시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그만큼 기대가 컸지만 아쉬웠던 전시도, 반대로 그 기대를 넘어선 전시도 있었다. 오늘 소개하는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은 후자였던 전시로 꼭 가보시길 추천한다.
서울의 외곽에 위치해 큰 마음을 먹고 발길 해야 하지만 이번 전시 꼭 가야 할 이유를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우선 영국 테이트미술관의 소장품을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는 푸동 미술관의 개관을 위한 특별전으로 기획되어 세계 곳곳을 투어 할 예정이다. 푸동 미술관의 개관전을 위해 큰 자본이 투입되었고 그만큼 더욱 힘 있게 구성된 전시이다. 둘째는 100여 점이 넘는 거장(43명)의 작품을 한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빛'이라는 주제로 낭만주의부터 동시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미술사 책에 등장하는 주요한 작가들의 다수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였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페인팅, 조각, 사진, 영상, 그리고 공간 설치에 이르기까지. 눈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감각이 자극되는 흥미로운 전시이다.
촛불, TV
이번 전시는 백남준의 <촛불, TV>로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개표하는 곳 뒤편으로 텅 빈 TV 한 대가 설치되어 있다. 복잡한 전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초가 대신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테이트미술관의 소장품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촛불, TV>만큼은 백남준 아트센터의 소장품으로 북서울미술관의 제안으로 함께 전시하게 되었다. 전시장 초입에 작품을 배치한 이유는 작품이 오래된 기술인 촛불로부터 디지털 시대를 의미하는 텔레비전까지 이 모두를 아우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빛을 다룬 세계적인 작가들의 잔치에 한국 작가가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작품 속 촛불은 불이 붙은 실제 초다. 이 초가 다 타고나면 사람이 직접 새로운 초를 넣고 다시 불을 붙여주어야 한다. 이는 기술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백남준의 생각을 담고 있다.
빛, 신의 창조물
18세기 영국에서는 종교화가 유행을 했고 자연스럽게 종교화가 인기를 끌었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이 빛을 창조했고, 성경 전반에 걸쳐 빛은 선과 진실을 상징하며 어둠은 반대로 악과 파멸을 표상한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빛과 어둠을 이용해 종교적 소재를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살아있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는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 시인이다. <아담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면 불타는 전차에 하나님이 앉아있고 오른편 어둠 속에 아담이 포박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애로운 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통금 시간이 넘어 들어온 딸내미를 혼내는 불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림 속의 신은 자신의 율법을 엄격하게 강요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담과 신의 얼굴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시인이었던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신화를 쓰기도 했는데 회화 작품에서도 기존의 종교화가 가지고 있는 내러티브나 도상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작가에 대한 자료 또한 많지 않은 탓에 그의 작품에서는 문학적 상상력과 해석의 여지가 남겨져 있다.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던 작가이기에 회화적 기술보다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갇혀있던 당시의 대부분의 화가들과 달리 윌리엄 블레이크는 근대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작품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성경 속 '대홍수'는 작가들에게도 흥미로운 주제로 인기가 많았다. 이번 전시실에서는 대홍수를 주제로 그린 제이콥 모어와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제이콥 모어의 <대홍수>와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대홍수>를 비교하면 낭만주의의 의미를 보다 직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잔잔한 제이콥 모어의 그림과 달리 윌리엄 터너의 작품에서는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대한 자연현상 아래 작고 나약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윌리엄 터너는 이발사 아버지와 정신병을 앓던 어머니 아래서 하층민의 계급으로 자랐지만 누구보다 지적이고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던 작가다. 작품 속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측 하단에 건장한 체격의 흑인이 주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있다. 당시 흑인은 노예 신분으로 동등한 사람이 아닌 재산의 일부로 여겨지만 터너는 작품 속에 흑인을 재난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며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전한다(같은 시대에 노예 제도 반대에 대한 연구가 있기도 했다).
터너의 <대홍수> 옆에는 그의 말년의 작품인 <태양 속에 선 천사>가 배치되어 있어 서로 다른 시기의 화법이 극명하게 비교된다. 윌리엄 터너는 말련으로 갈수록 진보적인 화풍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태양 속에 선 천사> 역시 전시 당시 대중의 비판을 피하지 못했고 이러한 여론에 터너는 많이 괴로워했다. 그러한 심리 상태 때문이었을까. 작품의 주제 역시 어둡고 염세주의적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진실과 정의를 표상하는 미카엘과 진실의 날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보이고 아래로는 머리가 잘린 홀로페르네스를 바라보고 있는 유디트, 좌측으로 아담과 이브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흐느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렇듯 성경 속 서로 다른 세 가지 이야기를 한 화폭에 담은 구성 역시 도상학적으로 희귀한 작업이다. 도록에 따르면 터너 작품을 통해 작가는 삶이 죽음과 고통을 동반하고 있음을, 그리고 곧 자신의 작품과 삶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동시대 작가 아니쉬 카푸어의 <이쉬의 빛>을 만나볼 수 있다. 아들의 이름을 딴 이 작품은 현대 작품이지만 종교적인 몰입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 여겨져 첫 번째 전시실에 함께 전시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작품을 들여다보면 위아래가 뒤집혀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오목한 작품의 형태는 마치 작품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전시 구성의 의도처럼 현대 시대에는 어쩌면 페인팅보다는 압도적인 크기나 이질적인 재료, 공간적인 경험이 포함된 작품 앞에서 우리는 감정의 동요, 혹은 종교적 울림을 얻지 않을까.
빛, 연구의 대상
두 번째 전시실은 공간 전체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일명 '터너의 방'이다. 이전까지 빛이 신의 창조물,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다면 계몽주의의 부상과 함께 빛은 개인이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전환되었다. 계몽주의와 함께 자의식이 생겨나며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변화한 것이다. 이번 전시실에서는 인간의 시선에서 관찰하고 묘사한 빛과 색채에 대한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윌리엄 터너는 1807년부터 1828년까지 영국 왕립 미술원의 교수로 재직했다. 이곳에서는 그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사용했던 강의 도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공간 내부의 빛을 탐구하거나 유리 구체, 금속 구체, 또는 물이 차있는 구채 등 질감에 따라 빛과 명암의 표현 차이를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연구작을 바라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스무 살 대학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윌리엄 터너의 강의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작가가 아닌 교수님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사실 그의 도안을 가까이서 찬찬히 들여다보자 '생각보다 정교하지 않은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언제나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시대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지금은 드로잉 기술이나 이론이 많이 발달했고 쉽고 효과적인 표현 스킬 또한 많이 발달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연구 자료였으리라. 혹은 (지금은 액자에 그럴듯하게 걸려있지만) 수업 중에 쓱쓱 빠르게 그려 설명한 그림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드로잉의 정교함보다 작품들이 보여주는 터너의 과학적 호기심과 깊이 있는 탐구의 흔적일 것이다.
<빛, 연구의 대상>에 걸린 두 작품은 앞서 첫 번째 전시관에서 만난 <대홍수>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을 읽지 않고서는 어떤 그림을 그린 것인지 그 주제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세밀한 묘사 대신 색과 감정에 집중한 두 작업은 추상화에 가깝다. 오른쪽의 작품은 대홍수가 일어나는 저녁을, 그리고 왼쪽의 작품은 홍수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을 묘사하고 있다. 난색과 한색이 대비되며 색깔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색채에 대한 터너의 관심과 연구를 엿볼 수 있다.
윌리엄 터너는 작품의 제목에서 '괴테'를 언급하는데 낭만주의 문학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색체에 대한 깊은 연구 끝에 「색채론」을 발간했다. 우리가 미술시간 한 번쯤 그려보았을 색상환 표는 바로 괴테의 연구였다. 괴테의 색채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와 반대 편에 서 있었던 계몽주의 과학자 뉴턴의 이론을 살펴야 한다. 뉴턴은 빛 측정 가능한 물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의 이론은 빛이 더 이상 신성한 존재의 것이 아닌 물리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는 색이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대상이라고 설명했지만 괴테는 빛에 의해 색이 결정되고 나아가 색은 인간의 감정과 기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당시 색체에 대한 괴테의 이론은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터너 역시 이에 깊은 감명을 받고 빛과 색채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다.
릴리안 린, 빛의 물리학을 구현하다
터너의 구체 연구작을 감상한 뒤 다음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유리 구체를 이용해 빛과 물질에 대한 연구를 한 현대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바로 릴리안 린의 <액체 반사>이다. 터너의 도안이 우리가 미술학원에서 공식처럼 배웠던 느낌이라면 릴리안 인의 작품은 직접 다가가 관찰하고 느껴보아야 한다. 미국 태생의 릴리안 린은 예술을 과학자의 호기심으로 접근한다.
바닥을 이루는 커다란 퍼스펙스 아크릴 용기에는 물과 파라핀 액체가 혼합되어 들어있다. 용기 아래에는 전동기가 있어 일정한 속도로 회전한다. 그리고 그 위로는 퍼스펙스 아크릴 구슬 두 개가 올려져 있다. 두 개의 구슬은 바닥의 액체에 의해 앞 뒤로 움직이고 가까이 설치된 조명은 이를 비춘다. 작품을 통해 작가는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물리학적 이론을 보여주고자 했다. (시간의 흐름에 의한 문제인지 설치의 오류인지 현재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구체는 움직이지 않고 아크릴 용기만이 회전하고 있다.)
빛의 인상
<빛의 인상> 전시실에서는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19세기 산업화가 진행되며 탁해진 공기와 매연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은 자연에 관심을 돌렸다. 여기에 교통수단의 발달, 튜브 물감의 발명은 화가들을 밖으로 불러냈고 직접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와 빛을 직접 야외에서 관찰하며 이를 화폭에 옮겼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전체적으로 시대적 순서에 맞추어 전시가 구성되지만 중간중간 동시대 작가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상주의 전시실에서 이러한 설치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것 같다. 인상주의 작가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인상을 화폭에 옮기고자 했다면 쿠사마의 조각은 설치되는 장소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을 작품에 담아낸다.
전시장에서 쿠사마의 <지나가는 겨울>을 들여다보면 작품 표면에 인상주의 작품들과 함께 내 모습이 비친다. 동시대 작가의 작품 위로 나, 그리고 150여 년 전에 제작된 작품들이 함께 비추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시공간이 겹쳐지는 듯한 일렁이는 감정이 몰려든다. 이 풍경은 이번 전시에만 존재하는 풍경 이리라.
이번 전시 포스터의 작품이기도 한 존 브렛의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 해협>은 전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바다의 냄새가 섞인 잔잔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다 표면에 부서지는 빛 하나하나를 정말 세밀하게 묘사되었고 바다 또한 수많은 종류의 파랑으로 메꿔진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활동 초기에는 세밀한 묘사에 집중했고 후기로 갈수록 바다 풍경을 중점적으로 그렸다.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 해협>은 1870년대 그가 직접 영국 남부 해안을 항해하며 그린 습작들과 노트를 토대로 제작한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정교한 바다의 모습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까지 담아내고자 했다.
<빛의 인상> 전시실에서는 모네의 작품 역시 만나볼 수 있다. 클로드 모네 <엡트강 가의 포플러>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작품인데, 보험 평가액이 500억 원 이상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종종 보았지만 실물로는 처음 본 작업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채도가 낮고 잔잔하다. 시간에 안료가 날아간 것일 수도 혹은 원래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겠다.
눈썰미가 좋으신 분들은 발견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포흐빌레의 센강>을 자세히 보면 작품에는 1885년 이라고 싸인 되어있지만 설명에는 제작연도를 1894년으로 기재한다. 당시 그림을 거래한 화상이 모네가 연도를 잘못 기입했다고 설명하는 글을 포함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실제 제작 연도는 싸인과 다르게 1894년임이 밝혀진 재미있는 작품이다.
장엄한 빛
<장엄한 빛>에서는 다시 낭만주의로 돌아와 조셉 라이트와 존 마틴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진실된 빛
<진실된 빛>에서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진실되게 담아낸 낭만주의 화가들의 풍경화를 만나볼 수 있다.
긴 복도 형태의 전시장에는 양 옆으로 존 컨스터블이 판화가 데이비드 루카스와 함께 제작한 여러 개의 판화가 전시되어 있다. 작품에는 존 컨스터블의 이름과 함께 판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루카스는 당시 회화적인 느낌을 판화에 고스란히 잘 담아낸 유명한 판화가 였다고 한다. 자세히 다가가서 살펴보면 판화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회화적은 느낌을 잘 살려냈다.
컨스터블이 활동하던 시기 인쇄 문화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미술 시장에서 역시 판화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것이 활발해졌다. 당시 컨스터블이 판화를 제작했고 판매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가 이미 반열에 오른 작가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앞서 살펴본 윌리엄 터너나 존 마틴이 장엄하고 위대한 풍경을 묘사했다면 존 컨스터블은 평범한 영국의 시골 풍경을 그리고 있다. 당시에만 해도 미술 장르에는 계급이 존재했는데 역사화나 종교화에 비해 풍경화는 가치가 낮다고 여겨져 보통 작은 캔버스에 그려졌다. 그러나 존 컨스터블은 평범한 시골의 풍경을 6 피드(약 2m)의 캔버스에 그렸고, 그의 작품을 계기로 풍경화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였다. 존 컨스터블이 없었다면 이번 전시의 포스터에 사용된 존 브랫의 평범한 바다의 풍경, 또는 변화하는 빛과 날씨를 그려낸 인상주의 화가들 또한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브루 나우먼, 빛을 가두다
빛과 우주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은 구체적인 설명보다 직접 작품을 보며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구체 형태 위에 달린 진동추에 의해 작품은 천천히 회전하고 작품에 반사되는 빛이 벽면에 흩뿌려진다. 천천히 움직이는 구체와 빛 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최면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작가는 바로 이런 빛의 심리학적 효과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빛과 색을 실험함으로써 우리가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과 이에 따라 변화하는 감정을 끊임없이 실험한다.
언뜻 비야 셀민스의 작품을 보고는 부분을 크게 잘라 확대한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다가가 바라보니 연필 드로잉의 느낌을 주었는데 이 작품은 모두 석판화 작업이다. 전시된 네 점의 판화 작품은 그녀가 세밀하게 그린 연필화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광활한 우주, 하늘, 바다, 사막과 같은 대상을 확대하여 잘라낸 이미지에서는 광활함과 동시에 고독이 밀려온다.
데이드 바첼러, 런던 거리를 비추다
긴 계단을 올라 2층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1층 전시장 입구를 빛냈던 <브릭레인의 스펙트럼2>의 작가 데이비드 바첼러를 만나볼 수 있다. 친절하게도 계단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작가의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온다.
데이비드 바첼러는 우리가 도시 환경 속에서 빛과 색을 인지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었다. <브릭레인의 스펙트럼2>은 작가가 런던 동부의 브릭레인 거리에서 발견한 빛과 색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7.5m의 빛과 색 기둥이다. (가보지 못했지만 브릭레인 거리에는 포장음식 전문점과 카레 전문 식당이 유명하다고 한다.)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의 앞면뿐만 아니라 복잡한 전선이 얽힌 대조적인 뒷모습까지 관람하도록 안내하는데 화려한 라이트박스의 전면부와 무채색의 복잡한 후면부의 대조가 도시의 모습과도 닮은 것 같아 흥미롭다.
실내의 빛
<실내의 빛> 전시실에서는 총 4개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벽에 걸려있는 세 점의 실내공간의 빛을 그린 작품, 그리고 전시실 바닥의 카펫이다.
필립 파레노의 <저녁 6시>는 많은 관람객들이 재미있어했던 작품이다. 작가는 저녁 6시 실내를 비추는 빛을 그대로 포착하여 카펫 형태로 박제한다. 전시장에는 창이 없지만 그의 작품에서만은 언제나 저녁 6시의 햇살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장에서는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실내, 바닥에 햇빛> 작품 아래로 필립 파레노의 카펫이 설치되어있는데, 마치 그림 속의 창에서 새어 나온 빛이 전시장의 바닥까지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필립 파레노의 작품은 각 전시장에 맞춰 제작하고 전시가 끝나면 폐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번 전시에 제작된 카펫 역시 작가가 지정한 브랜드의 특정 색상의 카펫을 주문하고 이를 작가의 도안에 맞춰 재단해 전시장의 크기와 상황에 맞추어 직접 제작했다.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업 역시 보험 평가액 100억에 달하는 높은 가치를 평가받은 작품들로 많은 사람들이 차분한 그의 실내 풍경 페인팅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오연서 학예사님은 특히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실내>가 사람들에게 평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형태의 반복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의 네모난 형태가 반복된다. 또한 중앙 모서리의 원기둥과 사람의 형태가 일종의 원기둥의 반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형태의 반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빛의 흔적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러시아 구성주의 추상성에 감명받아 추상적 언어로 빛과 투명성을 탐구했다. <K VII>를 살펴보면 사격형과 선이 서로 중첩되어 있다. 일부 사각형은 아래의 형태를 투영하는데 이는 마치 사각형들이 서로 포개진 느낌을 주며 작품에 공간감을 더한다. 밝은 색채와 투명성 때문인지 작품에서는 은은한 빛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후 올드 미디어인 회화를 탐구하던 모호이너지의 관심은 점차 뉴미디어로 옮겨간다. 그는 빛이 시각예술에 있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었다. 모호이너지는 다양한 사진 기법을 실험적으로 탐구하고 나아가 직접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었다. 금속으로 제작된 조각에 빛을 비추면 이 빛이 반사되며 다양한 흔적을 남기는데 이를 영상으로 촬영한 작품 역시 이번 전시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에서 사진은 창립 후 10년이 되도록 정규 과정으로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 모호이너지는 사진 분야 역시 적극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단순히 사진기를 이용해 촬영하고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다. 모호이너지는 이러한 뉴 미디어를 이용한 실험을 이어나갔고 그의 작업은 동료 작가들과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실의 사진은 촬영 기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진기를 이용한 촬영 기법의 포토그래피다. 둘째는 사진기 없이 촬영하는 포토그램으로 감광지 위에 사물을 올려두고 강하게 빛을 내리쬐면 빛과 그림자에 의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포토그램은 사진기가 발명되던 초기부터 존재했던 기술이지만 바우하우스의 예술가들은 이 기술을 활용해 빛의 특성을 탐구하였다. 스테판 테메르숀, 루이지 베로네지, 기요르기 케피쉬는 포토그램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하나야 칸비는 카메라 셔터를 장시간 노출하는 촬영 기법을 활용했다.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요제프 알베르스는 색인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색이 사물 교유의 속성이 아닌 빛의 속성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색을 '예술에서 가장 상대적인 매체'라고 설명하였고 색과 형태의 관계, 색이 갖는 공간성이나 입체성에 대해 탐구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사각형에 바치는 경의를 위한 연구> 연작을 만나볼 수 있다.
가장 왼쪽 이미지인 <정사각형에 바치는 경의를 위한 연구 - 밝게 빛나는>의 중앙에 위치한 높은 채도의 초록색 정 사각형은 채도의 차이로 인해 앞으로 전진하는 느낌을 주며 색채만으로 그림에서 잔잔한 빛이 비치는 듯한 느낌까지 전달한다. 중앙의 <정사각형에 바치는 경의를 위한 연구 - 밝게 노랑에서 점점 벗어나는>는 작품을 실제로 언뜻 보면 다른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서 세 개의 정사각형을 인지하게 된다(실제 전시실에서는 중앙의 두 개의 사각형이 사진만큼 경계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자세히 바라보면 네 개의 사각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눈은 가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알베르스는 이러한 '물리적인 사실과 심적 효과 간의 괴리'를 정확하게 인지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빛의 색채
리즈 로즈, 빛과 소리로 음악을 만들다
어두운 방에 들어서면 소음과 함께 양쪽 끝 벽에 흑백의 영상이 비추고 있다. 리즈 로즈의 <빛 음악>이다. 이 작품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된다. 스크린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의 그림자가 화면 영상과 함께 비치는데, 이런 관객의 그림자 역시 작품의 일부가 된다.
원래 작품은 16mm 영사기가 양쪽의 벽으로 빛을 쏘도록 제작되었는데, 제작된 시기가 오래되다 보니 16mm의 영사기 자체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양 쪽 영상의 싱크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북서울미술관에서는 디지털 프로젝션으로 작품을 설치했다. 작품이 실제 제작됐을 때처럼 영사기가 만들어내는 노이즈는 느낄 수 없지만,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림자를 촬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티븐 윌라츠, 빛을 움직이다
스티븐 윌라츠는 결과물로서의 예술보다 작품의 기반이 되는 개념에 집중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 과정에서 예술과 사회적 행동 간의 교차점을 탐구했다. 어두운 전시실에 들어서면 다섯 개의 조명이 번갈아가며 빛을 비춘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사람은 무의식 중에 그 안에서 규칙을 발견하고자 하는데, 작가는 이에 반하게 컴퓨터가 무작위로 생성하는 순서에 따라 규칙 없이, 랜덤으로 빛이 나오도록 설정을 했다고 한다. 현재의 시선에서는 크게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무작위로 나오는 불빛이 관람객들에게 매우 신기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제임스 터렐, 빛으로 숭고함을 경험하다
뮤지엄산의 웅장한 제임스 터렐 관을 떠올리고 들어선다면 조금 아쉬울 수 있지만 터렐의 작품을 작게나마 맛볼 수 있는 전시실이다.
항공기 조종사였던 터렐은 하늘을 날며 경험한 대기와 빛을 표현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특히 1960년대 지각 심리학을 접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빛을 순수한 매체로 다루는 작업을 시작한다. 앞서 살펴본 작가들이 평면의 회화나 오브제를 통해 빛을 탐구하고 구현했다면 터렐은 고도로 통제된 몰입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 안에 관람객을 포함하면서 온 몸으로 빛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파랗게 채색된 대기 속으로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어디까지가 벽인지 헷갈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전시장 안쪽에는 격벽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테두리로 밝게 빛나는 조명 때문에 이 격벽이 마치 둥둥 떠있는 것 같은 착시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가 만들어낸 공간 환경 안에서 관람객은 새로운 방식으로 빛을 인지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빛, 인간의 창조물
캐서린 야스의 작업을 힐끗 보면 을지로나 홍대의 힙한 스토어를 촬영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런던의 스프링필드 정신병원을 촬영한 사진이다. 처음 작가는 정신병원의 환자나 직원을 촬영할 계획이었으나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 촬영한 텅 빈 공간 사진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텅 빈 공간은 설명 없이는 어떤 장소인지 특정하기 어려웠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혼란이 재미있었다고. 작가는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같은 장소를 두 차례 촬영하고 하나는 일반적 사진과 같은 양화 이미지로, 다른 하나는 명암이 반전되는 음화 이미지로 출력해 이를 포개어 둔다. 라이트 박스 위에 포개진 같은 공간의 서로 다른 두 사진은 흥미로운 효과를 낸다. 전시장에서는 볼 수 없지만 라이트 박스를 끈 상태에서는 양화 이미지와 음화 이미지의 틈에서 생기는 얇은 선만이 보인다고 한다.
건축가 출신의 피터 세쥴리는 공군 레이더 기술관이라는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과녁 같기도 한 그의 작업은 주변의 사물을 인지하는 레이더의 모습과 닮은 것도 같다. <색상환II>는 프로그램된 순서에 따라 각 원의 색이 변화하며 일렁이는 느낌을 준다. 평면의 작업이지만 표면이 울렁거리는 착시 효과를 느낀다. 포스팅을 하며 촬영한 사진 속 원을 차례로 응시하고 있으면 각 색이 팽창했다 수축하며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 전시에서는 약 300년 동안의 빛의 역사를 함축해 놓았다. 빛의 역사는 결국 빛 인지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관찰의 대상으로 변화하고 나아가 인간이 직접 빛을 창조하기에 이르기 까지. 그 과정 안에서 우리가 빛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를 작품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변화하는 사회와 기술 속에서 인간은 또 어떤 방식으로 빛을 탐구하고 실험해 나갈지 기대가 된다. 전시장을 나설 때쯤에는 창을 통해 비추는 빛과 그림자 하나까지 모두 특별해 보인다.
포토존
이번 전시는 기본적으로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하지만 매주 수요일만큼은 사진 촬영이 허락된다. 날짜를 맞춰 갈 수 있다면 최상이겠지만 다른 날 방문하게 된다면 아쉬운 데로 상시 촬영이 가능한 데이비드 바첼러의 <브릭레인의 스펙트럼 2>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7.5M 크기의 커다란 대형 작품이 설치된 1층 전시장 입구에서 촬영하는 것도 좋지만 2층에서 내려다보면 작품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2층에 포토존이 준비되어 있다. 피터 세쥴리의 <색상환II>을 연상시키는 포토월 앞에서는 화려한 조명 탓인지 생각보다 사진이 어둡게 나오지만, 바닥에 드리워지는 빛의 그림자가 매력적이다.
도슨트 투어는 평일 1시에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선착순 15명에 한해 송수신기를 이용해 진행된다.
선착순이다 보니 조기 마감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도슨트 투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조금 일찍 여유 있게 방문하시길 바란다. 도슨트 투어에 참여한 관람객에 한 해 당일 1회 재입장이 가능하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화 - 토요일 10:00 PM - 8:00 PM
일요일, 공휴일 10:00 PM - 6:00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