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사빈 모리츠]
갤러리 현대 (3/11~4/24)
독일 여성 화가 사빈 모리츠(Sabine Moritz, b. 1969)의 개인전 《Raging Moon》이 갤러리현대에서 진행 중이다. 독일 퀠른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모리츠의 이번 전시는 아시아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나 전시에 대한 사전 조사 없이 지인에 손에 이끌려 방문했던 전시인데 들어서자마자 너무 좋아서 한참을 머물다 나온 전시이다. 모든 전시가 다 그렇겠지만 이번 전시는 특히 사진에 온전한 색채가 담기지 않았을뿐더러 마띠에르와 붓질을 눈으로 직접 볼 때 전달되는 느낌이 사진과는 너무 다른 작품이라 시간이 되신다면 방문해서 관람하시길 추천드린다.
1층 전시장
작가는 동독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유년시절의 추억이나 자서전적 경험, 전쟁의 참상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이미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 등을 추상의 언어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사실 평소에 좋아하는 그림은 조용하고 균형이 있는 그림인데 이 날 방문했던 갤러리들 중에 가장 큰 울림이 있었던 것은 신기하게도 갤러리현대의 모리츠의 추상 작업이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날그날 나의 기분에 따라 취향이 슬쩍 변하기도 한다.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이 끌리는 걸 보니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내면에 화가 많이 쌓였던 걸까 ㅎㅎ
같은 날 방문했던 학고재의 에릭슨의 작품이 계획적으로 짜인 추상이라면 그녀는 떠오르는 심상을 스케치 없이 바로 캔버스에 옮겨낸다고 한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같은 추상 작품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낸 두 작가의 작업이 멀지 않은 공간에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는 만큼 이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오늘의 나에게 풍성한 색채와 역동적인 선이 더 내게 다가오는지 자연을 닮은 잔잔한 색과 덩어리가 더 와닿는지 비교해 보며 말이다.
구상 회화가 구체적인 경험과 공간, 생각을 표현한다면
추상 회화는 보편적이지 않은 인간의 영역과 감각적인 영역을 다루며
정신적인 세계로 옮겨간다
/ Sabine Moritz
그녀는 추상화를 완전한 자유로움으로 설명한다. 그녀 역시 칸딘스키처럼 같은 작품을 보고도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것을 떠올리는 추상화를 음악과 유사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추상에는 직접적 영감보다는 무수한 감각적 인상이 켜켜이 쌓여있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가 자유롭게 뛰어놀며 온 감각으로 주변의 자연과 교감하는 것처럼 환경과 온 감각으로 교감하고 이를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그녀의 작품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색채가 서로 짜여 색의 표면을 만들어 내는데 개성이 강한 각각의 색이 신기하리만큼 서로 한데 어우러진다. 색과 터치가 한데 어우러져 마치 섬세한 춤을 추는 것 같다.
지하 1층 전시장
이번 전시에는 작품이 네 개로 짝을 이루어 전시되어 있다. 네 개의 작품은 같은 제목으로 묶여 가족처럼 한 벽에 쪼르르 모여 걸려있다. 조금씩 그 모양과 색이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한 운율과 크기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는데, 작가는 무를 향해가는 추상 속에서 이러한 구조는 질서 감을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4'라는 숫자를 사각형과 연결 짓기도 하는데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도, 공간도 사각형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질서와 안정감을 준다고 말한다.
추상은 거대한 무를 향해 나아가고,
우리는 보통 그러한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하죠.
따라서 우리는 혼돈에서 질서로 다시 회귀하고자 합니다.
만약 당신이 네 작품을 한 세트로 엮으면
그 작품들은 하나의 단출한 가족이나 그룹이 되고,
마치 모든 것이 질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Sabine Moritz
작가의 설명처럼 네 개라는 숫자가 주는 안정감도 있지만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점의 작품이 모여 있을 때 그 전달력이 더욱 커졌던 것 같다. 이야기를 하면서 네 개의 예시를 들어주는 것처럼 '나의 발트해는 이런 느낌이었어' 혹은 '나에게 3월은 이렇게 강렬하지'하고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이게 왜 3월일까'보다 '아, 작가는 이런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구나'하고 자연스럽게 와닿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의 추상 작업뿐만 아니라 구상 작품 또한 만나볼 수 있다.
2층 전시장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2층에는 가장 먼저 세 점의 동판화 작업이 반겨준다. 제목을 읽지 않고서는 세 작품의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각자 다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오래 자세히 들어다 보고 나서야 새싹이 움트는 나무를 찍어낸 판화임을 발견한다. 중앙의 <Vernal I>은 나무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여러 겹의 유화가 얹어져 있다. 움푹 페인 그림 속 두 개의 사각형 자국만이 판화임을 알려준다. 문뜩 '이렇게 모조리 덮어버릴 거라면 왜 굳이 판화를 찍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색을 얹다 보니 너무 심취한 것일까, 아니면 멈춰야 할 순간을 찾지 못한 것일까.
이번 전시는 정말 곳곳에서 만나는 작업들이 모두 너무나 큰 영감을 주었지만, 가장 좋았던 공간이 바로 위의 세 작품이 걸려있던 방이었다.
낮은 문을 지나 작은 전시실에 들어서면 갑자기 층고가 확장되는데, 그래서인지 새하얀 벽에 걸린 세 점의 커다란 작품이 별을 닮은 제목처럼 정말 반짝이는 기분이 들었다. 전시실 중앙에 서서 별자리를 바라보듯 한참을 빙글빙글 돌며 작품에 빠져들었던 공간.
2층에서는 그녀의 판화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동판화로 제작된 장미꽃 위로 유화가 덧칠해져 있는데 동일하게 찍힌 판화임에도 각각 다시 그린 것처럼 서로 다른 느낌을 받는다. 작품의 제목은 아마도 그녀가 작업을 한 날짜인 것 같다. 매일 비슷해 보이는 하늘도 그림일기처럼 기록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모두 다른데, 한데 모여있는 서로 다른 날짜의 장미는 마치 그녀의 일기 같았다.
관람객들이 부푼 마음을 갖고 느긋하게 전시장에 입장해서
자유롭게 전시를 보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Sabine Moritz
▼ 갤러리현대: 전시 설명
https://privateviews.artlogic.net/2/c0a376c70757294c505b82/
▼갤러리현대: 작가 인터뷰
[갤러리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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