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시간의 가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by 나날 곽진영

늦은 오후 집 근처 카페에 들렀다.

조금 쌀쌀한 가을의 초입,

무릎 담요를 하나 걸치고 캠핑 의자에 앉았다.

대형 스크린에는 비긴 어게인이 상영되고 있었다.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가을밤과 어울리는 영화 음악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홀린 듯 영화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평소 영화관을 가지 않는다. 가끔 남편이나 아이들이 집에서 영화를 볼 때에도 시작엔 같이 앉았다가 곧 다른 할 일을 하기 일쑤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몰입해서 보는 경우가 드물다. 단순히 영화뿐 아니라,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일이 시간을 버리고 있다고 생각될 때, 비생산적이라고 여겨질 때 무의식적으로 멀티태스킹을 시도한다. 처음의 여유는 금세 조급함이 된다. 지금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써야 할 글이 있는데. 정신이 산만해지고 빨래라도 접으려는 시도를 한다. 지금 이 상태 괜찮은 걸까?


세상은 끊임없이 생산성을 강요한다. 결과물을 내야 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획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나는 10년 동안 집에서 아이를 키웠다. 나에겐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생산적이었으나 사회는 비생산적이라고 판단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꽤 자주 불안했다.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했다. 자격증 공부도 하고, 학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나중엔 SNS에서 활동하며 각종 모임에 참여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책을 쓰고 강연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에 취해 완벽하게 몰입했다. 사회생활도 미숙하고, 세련된 일처리를 할 능력도 안됐지만 스스로를 다그치고 닦달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러는 새에 짧은 시간 많은 것을 배웠다. 내 세계는 확장됐고 무엇보다 나는 꽤 생산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회가 원하는 결과물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너는 공허하다고 느끼는 거야? 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생산성에 취해있던 나는 내 안의 낯선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럼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볼까, 나는 뭘 더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렇게 떠오르는 일들을 주저 없이 실행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을 잃은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급한 마음에 책을 뒤적거려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잘해왔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을까? 두려워졌다.

처음의 나는 뭘 하든 빛이 났다. 자화자찬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기쁨이 넘치던 때가 있었다. 하나씩 작은 돌멩이를 쌓아 올릴 때마다 만족감이 컸다. 유능한 사람이 될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나는 쉽게 지쳤고 불평도 많아졌다. 단순히 피로감 때문인가? 며칠 쉬어야 할까?





내 모든 서사의 시작엔 서툰 기타가 있다. 오랜 육아로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동네 언니를 따라나섰다가 만난 기타가 단조로운 일상에 리듬을 만들었다. 매일같이 기타 줄을 뜯으며 등대지기를 불렀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조금씩 박일 때마다 아이에게 자랑을 했고, 내가 만들어 낸 투박한 기타 소리가 음다운 음을 만들어냈을 때 마음이 요동쳤다. 조용조용 내 목소리를 밖으로 꺼내 놓았을 때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

그때만큼 비생산적인 시간이 있었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요 하나를 완곡하겠다며 몇 시간씩 기타를 붙들고 있었다. 오랜 시간 다리를 꼬고 있느라 발에 쥐가 나서 거실을 콩콩 뛰어다녔다. 와, 내가 이만큼 해내다니! 이건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수십 번씩 영상을 찍었다. 그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다.


강박적으로 '생산'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나를 스스로 거부했다. 기타도 어느 순간 일이 되었다. '목적'이 생기니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산책의 쓸모를 생각하고 걷는 사람을 '산책자'라고 부르는 건 내키지 않는다. 산책의 결과로써 쓸모가 발생하는 게 사실이라도 말이다. 매일 걸어서 건강을 얻을 수도 있지만, 거꾸로 신체를 단련하려고 걷는 사람은 '산책자'가 아니라 '생활체육인'정도로 일컬을 수 있겠다. (...) 산책 혹은 소요의 가치는 쓸모를 기대하지 않아서 귀해지는 쪽이다.



얼마 전 읽은 시와 산책의 한 구절이다. 한정원 작가는 무엇을 위한 산책이 아닌 산책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목적 있는 생활체육인 말고 쓸모없이 걷는 시간의 여유를 말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그런 산책을 해볼까 싶어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천천히 걸었다. 생각보다 꽤 연습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엉덩이에 힘을 딱 주고 팔을 앞뒤로 높이 흔들며 걸으면 살이 빠질 텐데? 같은 잡념과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의 리스트가 시시때때로 내 머릿속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을 담지 못하게 하는 '생산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걸 몸소 체험하며 정말 놀랐다. 어쩌면 내가 느꼈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비생산적인 시간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생산적인 시간은 쓸모없이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영혼의 균형을 맞추는 시간이었다. 다시 생산적인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번아웃이란 말이 흔하게 쓰일 만큼 과도한 노동으로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많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비생산적인 시간의 확보다. 이미 생산성을 최고의 가치로 인지한 우리의 뇌는 이 무해하고 의미 없는 시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다. 억지로 생각을 단절하고, 목적 없는 기쁨을 취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생산성은 없지만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것에 나의 시간을 조금씩 할애하다 보면 마음의 배터리가 충전되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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