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일정이 없는 날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헬스장으로 간다. 웨이트와 러닝머신을 하고 개운하게 씻고 나오는 순간 흡족함이 훅 밀려온다. 헬스장 옆 채소가게에서 양상추와 파프리카 몇 개 집어 집으로 온다. 구입한 채소를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어 샐러드 볼에 담고 계란이나 닭가슴살, 아보카도, 방울토마토. 무엇이 되었든 냉장고에 있는 몇 가지를 넣어 천천히 씹어 먹는다. 그러고 나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읽어 내려간다. 나는 언제쯤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려나 읊조리며 작가의 문장을 필사해 보기도 한다. "엄마~ 나왔어!" 우렁찬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나의 오후가 시작된다.
게을러지기로 한 후 운동을 시작했다. 노트북과 책 몇 권이 담긴 무거운 가방 대신 운동화와 세면도구만 간단히 챙긴다. 빵과 커피로 대충 해치우던 점심은 나를 위한 선물처럼 공들여 준비한다. 키워드나 조회수를 노린 글을 쓰려고 모니터 앞에서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기보다 좋은 글을 꾸준히 읽는다. 의도적으로 움직이려는 손과 발을 멈추고 나서 조금씩 내 몸과 마음은 회복되었다. 어느 때보다 삶은 평화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마음이 나를 때때로 조급하게 한다. 그런 생각도 한다. '이렇게 살면 돈 벌기는 틀렸구나.'
얼마 전 봤던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유튜브 방송에 참여한 할머니에게 한 구독자가 묻는다. 취직을 못해 힘들다고. 당장 늙을 방법이 없냐고. 그때 할머니가 말한다. "이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 등가 뭐시기가 무슨 말이냐. 물건의 가치만큼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것처럼, 우리가 뭔가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뭔가를 희생해야 된다 그거야. (중략) 열심히 살던, 너네처럼 살던, 태어나면 누구에게나 기본 옵션으로 주어지는 게 젊음이라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은 날 보면 알잖아. 너희들이 가진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당연한 것들이 얼마나 엄청난 건지. 이것만 기억해 놔. 등가교환.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
등가교환의 법칙. 내가 건강하고 게으른 삶을 살기로 했다면 자연스레 이전처럼 빠른 성장과 돈은 따라오지 않을 수 있다. 게으름과 생산성을 맞바꾼 보람이 있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 베스트셀러를 쭉쭉 뽑아내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고 유명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온전히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글이 되고 싶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진짜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음을 알고 있다. 열심히 살았고, 넘어졌고, 성찰해 나가는 이 과정을 글로 쓰고 있는 이 순간. 소진되어버리기보다 정성 들여 가꿔가는 삶을 살고 있는 지금 말이다.
바빠지고 나서 제일 먼저 내려놓은 게 기타였다. 어느 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 부르던 노래가 스트레스가 되었다. 푹 빠져서 연습할 시간을 낼 여유도 없을뿐더러, 늘지 않는 실력에 점점 자신감도 잃었다. 초심 같은 건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나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 뒤로 다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어설프게 반주하며 같이 부르는 시간을 갖고, 동아리 언니들과 연습하는 건지 수다 떠는 건지 알 수 없는 기타 수업시간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좋아하는 노래의 악보를 구하기 어려울 때는 대충 코드를 흉내만 내서 흥얼흥얼 부른다. 5년째 기타를 배우고 있지만 여전히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음색은 좋다'라는 말은 듣지만 고음불가인 건 여전하다. 그럼 뭐 어떤가. 내 마음 한 자락 표현하고 싶어서, 위로하고 싶어서 글을 쓸 때처럼 노래를 부른다. '잘'하고 싶었던 욕심을 내려놨더니 즐거움을 되찾았다.
돈은 벌지 못하지만 풍요를 벌고 있다. 계절의 흐름을 밝은 눈으로 담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줍고 있다. 꽤 만족스러운 맞교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