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새해는 로맨틱하지 않았지만

길을 잃기 위해서

by 나날 곽진영


나는 지금 제주에 있다. 바다가 보이는 침대 위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클래식 선율 위에 얹힌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는 ASMR처럼 평화롭다. 굳이 고민하지 않았는데도 글감이 흐른다. 이게 바로 디지털노매드의 삶인가.


일어난 지 3시간 30분 만에 얻은 평화였다. 아이들이 고요히 잠든 새벽 노트북과 책을 들고 호텔 로비로 살그머니 나갔다. 이른 아침 문을 연 커피숍은 없다. 그렇다고 혼자 조식을 먹으러 갈 수도 없으니 로비 한 귀퉁이에서 책을 펼쳤다. 어스름한 조명 때문에 집중이 되질 않는다. 결국 얼마 못 가 방으로 들어오니 첫째가 "엄마, 어디 갔다 왔어?" 묻는다. 아이와 조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둘째와 셋째도 기지개를 켠다. 눈 뜨자마자 수영장에 가고 싶다는 꼬마들과 한참 실랑이를 한다. "오늘은 집에 가야 하는 날이야. 아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엄마 혼자 너희 셋과 짐도 챙기고 수영장 가는 걸 다 하기는 힘들어." 결국 욕조에서 놀기로 합의를 본다. 세 아이가 목욕놀이를 하러 간 틈을 타 잠시 한숨을 돌린다.


연말, 연초를 여행지에서 보내다니. 계획한 일은 아니었지만 꽤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아름다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려야지, 일출을 보며 설레는 마음을 기록해야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써야지. 아, 요가 일일 체험도 해야겠다. 일주일 남짓한 일정 큰 계획은 없었지만 사이사이 나의 설렘을 쏙쏙 넣어놓았다. 현실은 달랐다. 노트북은 한 번 꺼내지도 못했고, 집중해서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책을 펼쳤다가도 그때그때 응답해줘야 하는 메시지를 모른척하기 어려워 답장을 보냈다. 겨우 확보한 나만의 짧은 시간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아쉬웠다.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일상에서의 하루와는 조금 달랐다. 오름에 가득 쌓인 눈을 보고 아이처럼 눈싸움을 했다가 어여쁘게 핀 동백꽃과 유채꽃 안에서 소녀처럼 사진을 찍고, 떠들썩한 시장을 걸으며 이것저것 맛보고, 바다에서 파도와 함께 꺅꺅 소리 지르며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케이크를 사다가 우리만의 조촐한 파티를 하고, 졸린 눈 비비며 깬 아이와 일출을 보러 나갔다가 동네 어귀 끝에 있는 멋진 카페에서 연신 감탄을 하며 책상을 손끝으로 만져보고 커피 향을 음미했다. 작은 서점 몇 군데를 들러 그곳 책방지기만의 큐레이션을 훑어보다가 마음에 쏙 드는 책 몇 권을 집어왔다. 읽고 쓰지 못한 수많은 순간을 아이와 남편의 손을 잡고 오롯이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알았다. 여행지에서의 오늘은 일상의 오늘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록됨을. 내가 꿈꿨던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토록 바라던 여유가 담겨 있었다. 오감으로 만난 기록이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이번 여행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에서 나온 구절이다. 이번 여행은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에서 익숙한 것들을 잃어버린 시간이었지만 포기함으로 풍요로울 수 있음을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잠깐 주어진 시간에 와다다다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 나는 충만하다. 생산적일 수 없고, 생산적이어서도 안 되는 여행지만의 감각이 좋다.

마흔이 넘도록 여행의 이유를 몰랐다. 길을 잃기보다는 낯선 곳에서도 익숙한 길을 찾아내던 나였다. 이제 낯선 길 위에 나를 내맡길 용기가 생겼다. 불편하고 두려운 곳으로 걸어갈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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