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살기 위한 방법
품위를 지키기 위한 치열함
올해의 첫날,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 '나날'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적은 롤링페이퍼였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산다는 마음으로 살려고 애썼지만 마음 한 편엔 그들의 눈에 비치는 내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무리 기를 쓰고 혼자가 좋다고 해도 인간인지라 인정욕구로부터 그리 자유로울 수 없다.
유유자적, 느긋한, 단아한, 우아한 등의 단어를 보며 빙긋 웃음이 났다. 첫 책을 계약할 때즈음 출판사 대표님이 말했다. "어디 가서 베짱이라고 하지 마세요. 브런치 소개 글 말이에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진짜 베짱이인 본인이 봤을 때 나는 절대 베짱이일 수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그때 속으로 출판사 대표님이 족집게 같다고 생각했다. 내 글을 진심으로 읽어준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나는 느긋하게 살기 위해 물 밑에서 발을 겁나 구르는 백조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반수를 하겠다고 몰래 자퇴를 했던 20살 두 번째 수능 날 아침, 엄마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총 천연색 무지개 같았다. 눈으로 욕한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은 기분. 그날 나는 엄마의 눈초리와는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느릿느릿 아침을 먹고 씻고 옷을 입었다. 이러다 늦겠다 싶을 만큼 굼벵이처럼 구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는 결국 참다 참다 폭발했다. "야!!!!!! 너 시험 끝나고 보자!" 아이고 무서워. 그래도 생긋 웃으며 시험장에 입장했다. 나는 반수에 성공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긴장감이 폭발할 것 같은 순간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아무 일도 아니다. 평소와 다르지 않다.' 일부러 몸을 굼뜨게 움직이는 것은 재촉하는 내 마음에 거는 브레이크다. 나름의 신호 같은 거다. 평정을 찾기 위해 나를 속이는 행위다. 나의 이런 태도가 타인과 일할 때 크게 마이너스라는 건 진즉 알았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는 모습, 싹싹하고 재빠르지 못한 행동,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우유부단한 태도. 무관심하고 느긋한 내가 윗사람들한테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유독 단체 생활이 힘들었던 건 이런 이유도 한몫했다. 혼자 일을 하는 건 이래서 좋다. 물 밑이 안 보이는 사람들의 눈에는 언제나 느긋하고 유유자적하고 우아한 나로 보이니까. 내가 얼마나 삽질을 하고 대짜로 뻗었는지는 모르니까.
누구나 그렇듯 나의 삶도 늘 치열하기에 집에서 논다던가 운이 좋았다던가 하는 말을 들으면 짜증 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이에게 휘둘리지 않고 평정을 지키기 위한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구나 한다. 세상 일은 혼자 다하는 것처럼 발악하거나 일한다고 예민하게 굴지 않고 우아하고 단정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내가 좋다.
느긋하게 살기 위해 딱 하나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우선순위다. 느긋함은 삶의 중요도를 지킬 때 나온다. 아무리 품위를 지키고자 해도 우선순위가 깨지는 순간 조급함이 튀어나온다. 노력으로도 평정을 찾기 어렵다. 삶의 우선순위가 머릿속에 명확해야 한다. 상위에 차지하지 않은 일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걸 놓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삶에서 꼭 지켜야 하는 것, 챙겨야 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무엇이 중요한 지 알고, 중요한 것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고 살면 느긋함을 유지할 수 있다. 하고 싶은 게 많아 베짱이로 사는 건 힘들겠지만 우아한 백조로는 살고 싶다. 그게 내 작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