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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Apr 21. 2020

내 삶이 리듬을 타기 시작한 순간

바람이 불어오는 곳

 

“연아 엄마, 혹시 기타 배우러 갈래?”

“와, 저 진짜 배우고 싶어요!!!”


마을 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만 꿈꿨던 장면이었다. 유독 음악을 듣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아하는 나였지만, 용기가 없어도 너무 없는 아이였다. 부끄러움이 많아 수업시간에 손 한번 들고 발표하는 것도 주저했고, 부모님에게조차 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저 하라는 공부와 다니라는 학원을 다니며 마음속으로만 두근대는 비트를 품고 사는 아이였다.


잠깐의 설렘도 잠시, “배우고는 싶은데요. 얘는 어떡해요. 하하.”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고, 막둥이는 이제 태어난 지 6개월이 되었다. 그렇게 또 현실을 핑계로 숨었다.  숨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 의도와는 달리 설레는 마음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두근두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수시로 가슴이 떨렸다. 고민의 시간 3개월, 내가 배우는 것이 가능할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평생 못하는 이유만 잔뜩 만들어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이번엔 달라.’

나는 콩닥거리는 마음에 두 손을 들었다. 2018년 10월, 어머니에게 받아온 기타와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가 탈 보행기를 양 어깨에 걸친 채 아기를 안고 기타 동아리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어머. 진짜 왔어!”

“아니 이 걸 무겁게 다 들고 왔어?”

낯선 사람들, 낯선 공간, 아이까지 데리고 가는 그 민망하고 어려운 자리에서도 기타를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나는 모든 민폐를 무릅쓰고 레슨을 받았다.




세 아이의 육아를 하는 동안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함이 컸다. 밤마다 온라인 강의를 듣고 시험을 보면서 자격증을 따는데 몰두했다. 언젠가 사회에 나갔을 때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리고 경력단절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아이를 키우면서 치열하게 보낸 그 시간들이 의미가 없었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기타를 배우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짜 좋아하는 것을 할 때의 기분. 이전의 노력과는 완전히 다른 몰입이었다. 해야만 하니까가 아니라 너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즐거움은, 없던 시간도 만들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이었다. ‘돈’이 목적이 아닌 ‘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기타 줄 하나도 제대로 튕기지 못하지만 나는 이미 기타리스트라도 된 기분이었다. 36살, 겨우 가슴에 품은 욕망 하나를 세상에 꺼내 놓았다. 정적이던 내 삶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나의 노래는 어린 시절 수줍은 소녀의 꿈이자, 엄마가 된 여자의 ‘자유’ 그 자체였다. 혼자 방구석에서 기타를 치며 흥얼흥얼 부르는 노래가 그 어떤 것보다 내 삶에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정말 제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였다. 그런 슬기로운 아줌마의 생활이 돌연 주위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은 밤늦게 무심코 찍어 올린 동영상 때문이었다.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의 리더가 그 동영상을 보고는  모임에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제의를 했다.

‘나한테 지금, 노래를 부르라는 거야?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짧은 통화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라졌다. 이건 들어볼 것도 없이 거절이었다. “안 해요.”가 아닌 “못해요.”였다. 그런데 그 혼란의 순간에서도 나는 “하고 싶어요. 할래요.”라고 말을 했고, 전화를 끊은 후에야 화들짝 놀랐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의 저자 김민식 pd님의 소규모 저자 강연회였다. 소규모라고 하지만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아직도 떠올리면 오싹할 만큼 소름이 돋는 그 시간, 나는 손이 찢어지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두렵고 포기하고 싶고 미쳤다고 자책하며 보낸 일주일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면. 첫 소절을 입에 읊조릴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손가락은 떨리다 못해 저렸던.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꾹 붙잡아 누르고, 악보가 안 보일만큼 눈앞이 캄캄하던 그 순간,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함께 불러주는 그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흐뭇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의 눈빛이 보였다. 생애 첫 용기를 낸 순간,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나에겐 그 시작의 순간이다. 즐거워 부르는 나의 노래가, 나의 진심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굉장한 경험, 그래서 계속 걸어가고 싶은 나의 길이다. 서툴고 어설픈 내 노래에 위로가 되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오늘도 계속 수줍은 나의 노래를 부른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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