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양평앓이의 시작

by 나날 곽진영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싸!


신랑이 쉬는 주말, 우리는 가까운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신나는 노래에 어깨춤을 추며 떠난 잠깐의 나들이, 그 나들이가 우리의 시작이 되었다.


건설 회사를 다니는 신랑 덕에 1년 만에 신혼집을 떠나 남양주로 이사를 했다. 나는 29년을 서울, 그것도 한 동네에서만 살던 사람이었다. 결혼하자마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네에서 살게 된 것도 낯설었는데, 공들여 꾸민 신혼집과 1년 만에 작별을 고하고 이사를 해야 했을 땐 정말 속상했다. 이사 온 동네는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집 앞으로 실개천이 흘렀고, 뒤에는 천마산이 있었다. 다행히 자연과 가까이에서 지내본 적이 없던 나에게 이곳에서의 시간은 대부분 평화로웠고, 점점 이곳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날도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양평의 소나기 마을로 소풍을 나섰다. 온갖 예쁜 행동을 하는 아이와 사진을 찍고, 한참을 뛰어다니며 웃었다. 아름다운 동화 마을을 금세 둘러보고 나오는데 내 눈에 여기저기 지어져 있는 예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빠, 이런 데 살면 진짜 너무 좋겠다!”

감탄을 하며 눈을 빛냈더니 신랑은 대번에 이런 소리를 했다.

“이런 데서 잘도 살겠네. 너는 뼛속까지 도시 여자라며?”

신랑의 놀림에도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렇게 마음에 꼭꼭 담았다. 그렇게 아주 사소한 나들이로 나의 ‘양평 앓이’는 시작되었다.


운전이 서툴렀던 나는 신랑 없이 그곳을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모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걸어 다녔지만, 그마저도 둘째가 태어난 후에는 불가능했다. 그 아름다운 동화 마을의 풍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신랑은 바쁘고, 나는 움직일 수 없으니 하루 종일 집에서 검색만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검색을 반복했더니 그 지역의 유명 초등학교들이 나왔다. 그랬다. 나는 처음부터 교육열이 높은 엄마가 아니었다. 자연에서 뛰놀며 아이를 키우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살고 싶은 곳에 대안 교육을 지향하는 초등학교가 있었을 뿐이다. 하나에 꽂이면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는 나의 장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양평, 전원주택, 혁신 초등학교, 아이의 교육,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의 관심사가 확장되었다.



“오빠, 나는 양평에 살아야겠어!”


신랑은 2년마다 현장을 옮기며 일을 한다. 보통은 주말부부를 하지만 아기가 어렸던 나는 잠깐이라도 신랑의 도움이 너무나 절실했기에 계속 신랑의 현장을 따라 이사를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 이사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니 ‘그럼 나는 양평에서 살아야겠다!’는 아주 명쾌한 결론이 났다. 정착이라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를 찾았다. 그런데 이 남자, 희한하게 나의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에 맞장구를 쳤다. 순순히 찬성하는 그의 반응을 보면서 ‘응? 내가 계속 따라다닌 게 싫었던 건가?’ 하고 아주 잠깐 '욱'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좋다고 했을 때 어서 알아보자, 그렇게 우리의 양평 살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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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공휴일, 여름휴가 뭐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우리는 양평을 돌아다녔다. 신기한 것은 땅과 집을 알아보러 나섰지만 갈 때마다 우리 가족에게 늘 소소하고 즐거운 추억이 쌓였다. 드라이브를 하다가도 ‘이 동네 마음에 든다.’하면 근처 부동산에 스윽 들어가 “땅 있어요?”를 묻는다. 보여주시는 땅과 집들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 마지막 코스로 그 동네 초등학교에 간다. 그저 초등학교 운동장만 있어도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와 아빠, 그 모습을 쳐다보며 커피 한잔 마시고 유모차에 있는 둘째를 바라보았던 나, 우리는 사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돈이 드는 여행도 아니었다. 부동산 문을 열 수 있는 약간의 용기 외에는 어느 것도 필요치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또 다른 행복이었다. 하루 종일 뛰어놀던 아이는 잠이 들고, 그때부터 신랑과 나는 아주 긴 수다를 떨었다. 별거 없는 그 과정이 다 너무 좋아서 나에게 양평은 마냥 좋은 도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아주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보게 되었다. 양평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곳에 위치해서 상대적으로 땅값도 저렴했다. 우리는 이제 주말부부를 해야 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걱정이 있었는데, 그 또한 충족이 되는 곳이었다. 예쁜 집들과 마당, 그네, 개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들, 이런 것들에 우리는 정말 입이 쩍 벌어졌다.

“여기는 정말 환상적이야!”

신랑과 나는 너무 좋다며 물개 박수를 치며 아주 세세한 것 까지 알아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결정했어? 어디가 제일 맘에 들었어?”

“다 좋았지, 다 좋았어. 그런데 흐음...”

뜸을 들이는 내 모습에 신랑은 단번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너무 고급스러워. 그게 문제야.”


그때의 황당하단 신랑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또 시작이냐 그런 표정이었던가.

“처음에는 그냥 그림 같은 집에서 아이와 사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꿈꿨거든. 그러다 아이들이 원 없이 뛰어놀았으면 좋겠다 싶어 졌고.”

“여기는 초등학교도 가깝고, 아이들도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 맞는데?”

“맞아. 그런데 시골 동네에서 잘 살아봤자 거기서 거긴데, 그렇게 좋은 집에 살면 아이가 어떤 생각을 갖고 크겠어? 안 그래?”

“부모가 어떤 생각을 갖고 아이를 키우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니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것도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우리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얻고자 하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해 보자.”


1년 여간 땅을 찾고 집을 알아보면서 우리는 꽤 많이 성장했다. 단순히 집이 아닌 그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대수롭게 생각했던 신랑도 생각이 구체화될수록 자기가 진짜 원하던 삶에 대한 생각을 꺼내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모습, 우리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결혼하고 가장 깊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급기야 한 맘 카페에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저는 4살 2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고민 끝에 이 글을 씁니다. 처음에는 전원생활을 희망해서 약 1년여간 전원주택 부지를 찾아 헤맸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마음에 드는 땅을 찾기 힘들고, 땅이 맘에 들면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유명 초등학교 근처에는 땅을 구하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처음 시골생활을 시작하는데 친인척이나 이웃도 없이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노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고요. 그래서 저희 부부가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육아 협동주택입니다. 학교 부근에서 또래의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전원생활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원생활의 로망은 공동주택이 아닌 단독주택이기에 섣불리 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저희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함께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기대로 글을 올려 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연락 주세요.


그때의 글을 찾아서 옮겨 보았다. 협동조합에 대한 지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였고, 서울의 성미산 마을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던 것이다. 물론 사람이 모이지 않아서 실패했다. 이 글을 작성한 지 4년이 지났고 아직도 가끔씩 쪽지가 온다. 혹시 어떻게 됐냐고. 아, 실패했습니다. (웃음)


그런데 이 글을 퍼오면서 깜짝 놀랐다. 세상에, 나 지금 이렇게 살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