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날 작가 Oct 26. 2020

4인 가족의 생활비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내가 하수처리장에서 살게 된 이유

얼마 전, 나의 책 <우리는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가 세상에 나왔다. 예상외로 책의 반응이 좋아서 나도 살짝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 책은 투고의 과정도 참 힘들었고, 나의 삶 자체가 소위 말하는 인싸가 아닌, 아싸의 삶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옳다고 하는 길 밖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책이 시대를 잘 만났는지 코로나로 너도 나도 힘든 시절에, 사람들이 갈망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가 어쩌면 세상과 통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회사생활로 힘들고, 나 또한 독박 육아로 힘들었던 시절. "에잇! 때려치워!" 홧김에 내뱉은 나의 말이 어느새 현실이 되어 남편이 회사를 옮기게 되었을 때, 마음 한편엔 불안함이 있었다. 남편의 수도 없는 "괜찮겠어?"라는 말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 정말 괜찮을까. 4인 가족이 180만 원으로 살 수 있을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는 쳤는데, 정말 잘 살 수 있는 걸까?


한동안 불안함에 엄마들이 자주 찾는 카페를 들락날락했다. 4인 가족 생활비로 검색해서 글을 찾아보기도 했다. 기본이 2~300만 원 정도였고 어떤 사람들은 4~500만 원으로도 빠듯하다는 댓글들이 있었다. 희한한 것은 그 댓글을 보며 좀 안심이 되었다. 그래, 사람마다 씀씀이가 다 다르니까. 하기 나름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건설 회사에서 근무했기에 위험수당까지 포함하면 400만 원이 좀 안 되는 돈을 받았었다. 나는 그중 100만 원 정도를 저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씀씀이도 그리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고민을 하다 보니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면 그 월급으로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괜히 생협과 유기농에 집착하지 말고, 입지도 못하는 원피스들을 사 대지 말고 알뜰하게 살아보는 거야! 갑자기 의지에 불타올랐다.


그런데. 그런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남편, 그런데 말이야. 180만 원으로 살 수는 있는데 저축은 못할 것 같아."

사실 그 말에 남편은 반색을 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혼 전에 꽤 가난한 삶을 살았다. 물론 우리 집이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나름 부자였던 것 같은데(라고 말하면 엄마가 서운해하시겠지만), 아빠와 나는 매우 가난했다. 모든 월급을 차압당하고 30만 원의 용돈으로 20대를 살았다. 그걸로 생활이 불가능해서 퇴근하고 과외를 하면서 삶을 이어왔다. 통신비부터 교통비까지 모두 내가 해결을 해야 했기에 남편, 그때의 남자 친구, 는 통신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19살 수능이 끝난 날 담임선생님의 자녀들을 가르친 것부터 시작된 과외 인생은 단 한 번도 쉬지 못하고 결혼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내가 결혼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너무 심해 회사를 그만둔 후, 집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시간이 나에겐 30년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둘이 사는 신혼집, 어지를 것도 없이 남편이 출근하면 텔레비전을 보고 커피숍에 나가서 책을 읽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로 아이를 키우면서도 나는 돈 걱정 없이 사는 삶에 꽤나 큰 만족감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는 삿대질을 하며 취집을 했다고 욕할지도 모르는 그 상황이 나에겐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여유이자 행복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삶이 피폐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편, 회사에 사택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직을 한 남편의 회사에는 직원이 살 수 있도록 사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곳은 하수처리장 안의 작은 빌라였다. 남편은 월급도 적게 받는 마당에 그런 곳에서 우리 식구가 살지 않았으면 했지만 내 고집에 결국 우리는 하수처리 장안의 작은 집에 터전을 마련했다. 월든의 소로우가 숲 속에서 나무집을 짓고 인생 실험을 했던 것처럼 나도 하수처리장에서 가난 실험을 하겠다며 꽤 비장한 각오를 하고 들어갔더랬다. 가난을 선택하겠다며!


 내가 쓴 책에서도 이 대목이 나오는데 독자들 중 몇몇이 나에게 그런 의문을 털어놓았다.

"왜? 왜 하수처리장에서 살았어요?"

나는 왜 굳이 하수처리 장안으로 들어갔을까. 내가 그곳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책에 쓰였지만 내가 왜 그곳을 선택했는지는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가난 실험을 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가기에는 굉장한 혐오시설인데 말이다.


그때 나의 생각은 그러했다. 4인 가족의 평균 생활비보다 훨씬 적게 쓴다고 해도 180만 원으로는 저축조차 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을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젊은 녀석들이 그냥 해이해져서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나와 가난해졌을 뿐이다. 나는 그런 삶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대책도 없이 무작정 가난해지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결심을 했다. 시간을 돈으로 샀으니, 돈으로 돈을 사겠다고. 내가 엉덩이에 깔고 있었던 아파트 전셋값을 종잣돈 삼아 돈을 사겠다고.


월급도 적은데 사는 곳이라도 좋은 데 살아야 덜 기죽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이미 이런 선택을 할 때 세상에서 어깨 으쓱하며 살기는 틀렸다고. 그럴 바에야 그냥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겠다고. 그래서 주거비가 0원인 그 하수처리장으로 들어갔다.


취집이라도 한 듯 경제적으로 안전한 온실 속에 살던 주부는 그렇게 하수처리장으로 내던져졌다. 아니다. 두발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내 가난 인생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 라이프도 시작되었다.



하수처리장 작은 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