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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Jun 03. 2021

취향에도 급이 있나요?


가수 아이유가 25살에 팔레트라는 노래를 불렀다. 코린 음악을 좋아하고, 진한 보라색을 좋아하고, 단추 있는 파자마를 좋아하고 반듯이 자른 단발을 좋아하고. 쉬운 거, 촌스러운 걸 좋아한다는, 자신의 취향을 확고하게 이야기했다. 언제나 사랑받는 아이, YOU. 지드래곤의 맛깔스러운 랩핑까지 완벽한 노래였다.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며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나에게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취향이 있으면 좋겠다! 문득 막 영어 회화를 배웠던 때가 생각난다. My favorite is~ 단어를 떠올리는 것보다 진짜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더 힘들었던 기억. 나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있나? 유행 따라 시시때때로 바뀌는 것 말고 진짜 좋아하는 것이 정말 있나? 며칠을 꼬박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렸었다.

신기한 건 이 노래가 크게 유행하고 우리나라엔 보라색 열풍이 불었다. 보라색이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이었나 싶을 정도로 보라색 천국이 되었다. 아이유가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커밍아웃을 해서 온 나라의 숨어있던 보라돌이들이 튀어나온 건지, 아니면 한 사람의 취향이 온 국민의 취향을 바꿔놓았는지. 그 와중에 나도 보라색이 가장 좋은데. 커밍아웃이었을까?


취향이라는 것은 보통 당대의 유행과 일치한다. 자꾸 노출되니 익숙해져서 좋아한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왠지 그것을 좋아한다고 해야만 인싸가 될 것 같아서 좋아한다고 할 때도 있다. 동네 언니가 그랬다. "나 아미야."라고 하면 개념 있는 어른이 된다고. 그래서 자기는 이제부터 임영웅이 아니라 BTS를 좋아한다고 말하겠다고. 농담인데, 마냥 농담 같지 않은 말. 어쩌면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나의 취향을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행에 편승하지 않은, 오롯이 나의 취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긴 있을까.

 

한때 내 주위의 모든 여자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자기 관리를 하는 여자라면 당연히'라는 설명이 생략되어있는 것 같은 아메리카노가 나에겐 그저 쓴 커피였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4천 원을 지불했다. 그 와중에 내가 미약하게 주장한 건 고작 "아이스" 아메리카노 정도였다. 얼음이라도 들어가면 커피 맛이 좀 연해져서 참을 수 있으니까. 왜 그랬을까? 이런 사소한 것조차 모두가 YES 할 때 혼자 NO 하기 힘들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나는 라테.” 그리고 서로 깜짝 놀랐다. 우리 넷 다 카페라테를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우아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옆에서 조용히 “나는 라테.”를 속삭이던 사람들이었다. 이게 뭐라고, 한참을 아메리카노 파에 눌려있던 라테 파의 설움에 관해 이야기했다. 성수동 그 핫한 카페에서 여자 넷이 나란히 카페라테를 마시는 경험을 했다. 그래, 이게 어때서. 라테가 어때서. 신맛 나는 커피 맛 좀 모른다고 인생이 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참에 눈치 보지 말고 진짜 좋아하는 것에 대해 대놓고 말해볼까. 나는 청순한 생머리보다 발랄한 파마머리를 좋아한다. 화려한 무늬의 긴 원피스를 사랑한다. 넥이 좀 파이면 더 좋다. 몹시 추운 날 창문을 활짝 열고 두꺼운 이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음악을 크게 틀고 창문을 내린 채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낮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났을 때의 몽롱함을 좋아한다. 우유가 듬뿍 들어간 아이스 라테를 좋아한다. 쉽게 쓰인 책을 좋아하고 쉽게 쓰는 글을 좋아한다. 그리고 보라색이 아니라 귤색을 좋아한다. 2년 동안 보라색 옷만 엄청나게 사댔지만, 커밍아웃이 아니었다. 아이유가 좋아한다니 그냥 좋았던 거다. 

예쁨의 기준이 다르고, 많이 게으르고, 아이처럼 유치한 게 나다. 우아를 떨 때가 종종 있지만 부끄러워서 그러고 있을 뿐 내 속에는 어린아이들이 때를 지어 움직인다. 


이제는 다양한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취향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리 대단하지 않아도 자기만의 서사가 있는 콘텐츠들이 사랑을 받는다.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모임도 용이해졌다.

나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었다. 그런데 뭉뚱그려 “글 좋아하는 사람 모이세요!”라고 하지 않았다. 필사하며 글을 쓰는 모임, 블로그에 글을 쓰는 모임,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주제가 있는 글을 쓰는 모임, 책을 쓰기 위한 모임, 마지막으로 글을 읽고 이야기하는 독서 모임까지. 글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다른 취향의 모임이다. 그래서 모임마다 색깔이 다르다. 다른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취향은 마음이 끌리는 방향이다. 그 방향이 명확할수록, 확고할수록 내가 원하는 세계에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숨기지 않고 드러낼수록 “대세” 안에 섞여버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지. 유행에 편승한 취향 말고 진짜 당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혹시 모르겠으면 집요하게 찾아보기를. 인생의 새로운 재미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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