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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Jun 08. 2021

내 인생의 ost


세월이 지나면 힘들기만 한 나의 나날들이 살아온 만큼 다시 흐를 때 문득 뒤돌아보겠지.

바래져 가는 나의 꿈을 찾으려 했을 때 생각하겠지.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우리들의 추억들을, 그 어린 날들을.     


김동률의 졸업이 귓가에 흐른다.

살아온 만큼 다시 흐를 때 문득 뒤돌아보는 날이, 오늘이구나. 싶은 날이다.     


폭풍처럼 마음이 힘들던 중 2병 걸린 소녀가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은 현실과 정반대의 로맨틱을 상상하는 일이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을까. 친구들과 함께 갔던 노래방에서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동아리 선배들. 그중 한 명이 졸업을 열창했다. 얼굴만 슬쩍 알던 선배는 그날 이후 쉬는 시간 복도에서, 체육 시간 운동장에서, 등굣길에도 하굣길에도 자꾸 보였다.


졸업을 열창한 선배가 진짜 졸업을 하던 날,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교실 앞을 찾아갔다. 곱게 쓴 편지 한 장과 함께, “선배님, 졸업 축하드려요.”라고 개미 똥구멍만 한 소리로 간신히 말하고 뒤돌아설 때, 선배의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어머 고맙네. 사진 한 장 찍고 가.” 꽃만 주고 도망치려던 계획은 실패했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하고 차렷 자세로 그렇게 선배와 사진 한 장을 남겼다. 한 번도 그 사진을 본 적이 없지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겠지. 원래대로라면 졸업 선배와의 추억은 졸업식 장미 한 송이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다음 날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1 분단 제일 끝에 앉아있던 나는 복도의 웅성거림을 듣지 못했다.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건너 건너 편지 한 장이 전달되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지도 못한 채 곧이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미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졸업한 선배들이 너희에게 아주 좋은 조언을 해주려고 인사를 왔다며 복도 밖에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딱 봐도 선생님의 애제자들이었고, 그 애제자 중에는 졸업 선배가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싱긋 웃는 선배를 보고 너무 놀라 그들이 우르르 다시 나갈 때까지 나는 한동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렇게 수줍게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다.




김동률의 졸업이 흐를 때면 자연스럽게 재생되는 25년 전의 기억. 여드름이 조금씩 올라오던 풋풋하고 귀여운 여자아이의 연둣빛 마음. 그때만 할 수 있는, 그때만 가질 수 있는, 윤슬처럼 반짝이는 기억. 어쩌면 나는 꽤 밋밋하고, 단조롭게. 모범적이고 답답하게. 그리고 아주 냉소적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을 아이였는데, 그 시절을 예쁘게 지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그래서 참 고마운 기억.


사랑을 고백함에 있어 재고 따짐이 없던 어린아이. 나였지만 나라고 할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어떤 바람도 어떤 물질도 필요하지 않았던 그저 마음 하나만으로 아름다운 시절을 보낸 그때의 내가, 마흔이 가까운 나에게 말한다.


행복이 뭔지 기억하라고.

사랑이 뭔지 기억하라고.

뭘 받을 때가 아니라 그저 줄 때가 제일 행복한 거라고.

내가 이렇게 알려줬으니, 잊지 말라고.


아이가 셋인 엄마가 이런 글을 써도 되나? 망설여져서 글을 시작하지 못했지만, 차곡차곡 그런 내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그 아름다운 시절의 나도 기억해주고 싶다. 등나무 벤치 아래서 한 시간 내내 말 한마디 못하고 신발 끝만 바라보던 나와,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과, 손끝이 닿았을 때의 수줍은 미소까지. 그때의 예쁜 나를 떠올린다. 바래져 가는 기억 속에 유난히 빛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이렇게 남겨 본다. 어쩌면 한참 왜곡되었을지 모를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를. 그래도 충분히 괜찮은 어린 날의 이야기를. 나의 첫사랑을.

     

한 곡의 노래로 재생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축복이다. 음악은 참 희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노래 하나인데, 그때의 바람이 어땠는지,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그때 상대의 표정은 어땠는지, 순식간에 잊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재생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하니까. 영화의 OST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도 그 장면이 리플레이 될 수 있게 하니까. 내 삶의 OST 하나쯤은 가진 인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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