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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Jun 09. 2021

내 인생의 전환점은 결혼이었다.

나도, 에세이스트_5월의 이야기

구제 청바지에 줄무늬 티셔츠, 색이 바랜 녹색 후드 점퍼, 약간 굽은 어깨, 앞으로 살짝 빠진 기다란 목.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


“그 남자 키가 작대. 나는 절대 힐을 포기 못 하겠으니, 네가 나 대신 좀 나가라.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


직장 동료의 갑작스러운 부탁으로 얼렁뚱땅 나갔던 압구정역 3번 출구. 그 앞을 서성이고 있던 그의 모습은 그랬다. 정말 그랬는지, 그날 내 마음이 시큰둥해서 그랬는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확실한 건 첫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남자는 아니었다.


그날 우리가 먹은 음식은 인도 카레. 그것만큼은 정확하게 기억난다. 나는 슈퍼에서 파는 O뚜기 카레는 알아도 인도 카레는 그날 처음 먹어봤으니까. 그는 생판 처음 본 나에게 어설픈 서울말로 친구와 인도를 여행했던 일, 혼자서 국토대장정을 했던 일, 마지막 도착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울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솔직한 거지?’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폭 빠진 나는 계속 울리는 벨 소리도 무음으로 돌렸다. 이 만남이 별 볼 일 없을 줄 알고 뒤에 약속까지 잡아놓고 나왔던 나로서는 당황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날 나를 그에게 잡아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서 또 만나고 싶다고, 이 사람이 꼭 나에게 다시 연락하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으니까.

 

나는 혼자서 하는 여행 같은 건 엄두도 못 냈고 9시만 되면 들어오라는 독촉 전화에 마음 놓고 술 한 번 마셔본 적도 없었다, 그게 또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은, 그냥 그런 생활에 길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와의 짧은 대화에서 나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끝도 없이 걷고 또 걷는 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일, 손에 쥔 동전 몇 개로 그리운 이의 목소리를 듣는 일. 그런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만약 내가 저 남자와 살 수 있다면 나에게도 저런 바람의 냄새가 날까.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나는 늘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했고, 증명하지 못했을 땐 가차 없이 비난을 받았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시당했고,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늘 부정당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가족한테. 매일 아팠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감기를 달고 살았고, 편두통을 때때로 심하게 앓았고, 가위에 눌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 “마음이 편한 상태”가 어떤 건지 경험했다. 내가 이토록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난 불편하지 않아, 라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사실은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희망이 없어 지레 포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 예민하고,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날도 그는 결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 말해 봐.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당신을 화나게 했니.’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날, 옆자리 언니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나는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나를 자책하고, 부단히 또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겠지? 누구에겐 결혼이 무덤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와의 결혼이 새로운 시작이었다. 새롭게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여정이었다. 기복 없이, 조건 없이, 그저 바라봐주는 그가 있어서 나는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0년,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 이 지랄 같고 고고한 척하는 여자랑 살아줘서 고맙다고. 받은 것이 많지만, 준 것도 많으니 쌤쌤인 걸로 하자고.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지켜봐 줘서.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이제야 이야기해본다.

 

“당신이 나에게 처음 고백하던 날 편지와 함께 내밀었던 "LOVE & FREE"처럼. 당신을 만나 사랑을 하고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어.”



* 이 글은 5월, 예스 24  공모전에 냈던 글입니다.

https://brunch.co.kr/@leafmomfly/47

절대 윗글을 무마시키기 위한 글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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