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날 작가 Jul 29. 2021

엄마와 팬티와 운동화

내가 모르는 엄마의 마음

아이들 점심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시간,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잠시 받을까 말까 고민한다. 바쁠 땐 잠시 건너뛰어도 되는 게 친정 엄마의 전화다. 엄마는 대게 아무 용건 없이 심심할 때 전화를 하니까. 못된 딸이다. 그러나 오늘은 받기로 한다.

"진영아, 운동화가 너무 예뻐서! 하나 사줄까?"

엄마는 시장에 갈 때마다 종종 전화를 한다. 예전엔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사서 안겼는데 요즘은 이렇게 내 의향을 묻는다. 예전엔 보지도 않고 싫어!라고 했는데 이제는 대충 응, 이라고 답한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묘하게 달라지고 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얼마나 편한지 몰라. 엄마가 고모들 것 사면서 네 것도 사는 거야."

잠시 "응"이라고 답한 걸 후회했다. 60대의 두 고모와 나란히 같은 신발을 신은 내 모습이 상상돼서.


빨리 가지고 가라는 엄마의 재촉에 세 아이를 데리고 친정을 갔다. 엄마는 내가 숨도 채 돌리기 전에 신발을 가지고 왔다. 분홍색에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 것처럼 반짝 거리는 여름 운동화였다.

"예쁘지? 빨리 신어봐."

벌써 엄마에게 받은 다섯 번째 신발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신랑 편에 아이들 내복 몇 벌과 내 팬티 몇 장이 들어있는 봉지를 받았다. "맞다. 엄마, 근데 그 팬티는 뭐야?"




"엄마, 이거 엉덩이가 다 보여! 할머니가 팬티를 잘못 샀나 봐!"

아이들은 여러 장의 팬티 중 엉덩이가 다 비치는 시스루 팬티 하나를 손에 들고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보낸 검정 봉지 덕분에 그날 저녁 우리는 한동안 쉬지 않고 웃었다.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엄마에게 묻자 엄마는 정색을 하며 이야기했다.

"야, 그거 엄청 좋은 거야. 입어 봤어? 그런 거 더 나이 들면 못 입어. 지금 입어야지."

"내가 잘 사서 입는데 뭐하러 사서 보내. 엄마나 사 입지."

안 그래도 엄마 친구들이 핀잔을 줬단다. "아니 진영이 엄마는 왜 그렇게 맨날 진영이 팬티를 사는 거야?" 산속에서 애 키우느라 이런 거 잘 못 산다고, 그래서 내가 챙겨줘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엄마가 그렇게 너를 생각해. 이런 엄마가 있는 줄 알아? 다 지들 것만 산다고!" 그렇게 한참 생색을 내더니 말 끝에 이런 이야기를 보태었다. "너 결혼하고 며칠 있다가 집에 와서 네 옷이랑 속옷이랑 챙기는데. 그 입던 걸 가방에 챙기는데. 시집간 딸 속옷도 못 사서 보낸 게 너무 마음이 아파가지고..."


엄마의 뜻밖의 고백에 깔깔거리고 웃던 게 민망해졌다. 아니 뭘 그런 걸 여태 마음에 품고 있지. 벌써 결혼 10년 차에 애를 셋이나 난 딸인데. 그래서 왜 자꾸 운동화를 사주냐고 묻지 않았다. 엄마의 어딘가에 또 그런 기억이 있는 건가 싶어서. 괜히 또 엄마가 후회했던 일들을 들추고 싶지 않아서.


우리 엄마는 인정 욕구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아주 작은 것에도 늘 자신을 칭찬해 주길 바라고, 고마워해 주길 바란다. 청개구리인지 상대가 그런 걸 대놓고 원하니까 자꾸 반대로 이야기하게 되는 나였다.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취향도 아닌데 자꾸 강제로 안기니 그리 고맙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거절하면서 본인이 주고 싶은 것만 주는 엄마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와 나의 관계는 서로 충족되지 못한 채 애정과 증오 어딘가에서 늘 머물렀다. 나는 그것이 온전히 엄마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성숙하지 못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내 감정을 잘 단속해서 우아하게 살아야지 다짐을 종종 하곤 했다. 어쩌면 이런 나 때문에 우리의 관계는 더 틀어졌는지도 모른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고마운 표현도 안 하는 어린 딸이 얄미워서. 야속해서.


"너무 편해. 엄마는 이런 걸 잘도 사네. 다음에도 종종 부탁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렇지? 너무 편하지? 이런 엄마가 어딨냐! 너는 진짜 엄마 잘 만난 줄 알아." 또 시작된 엄마의 레퍼토리가 더 이상 아니꼽게 들리지 않는다. 속옷을 챙기는 딸의 뒷모습을 10년 동안이나 잊지 못하고 마음 앓이를 했던 엄마가 가여워서, 여전히 팬티만 보면 내 생각이 나는 엄마 마음을 이제야 알아서.




온 물방울이 나에게 달라붙는 것 같은 습기 가득한 아침, 엄마가 사준 운동화를 신고 집 한 바퀴를 걷고 들어와서 이 글을 쓴다. 이 신발 진짜 편하다고. 이런 거 꼭 필요했는데 고맙다고. 엄마한테 카톡 하나 보내야겠다 생각하면서. 엄마 어딘가에 남아있을 생채기가 이제 그만 아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인생을 바꾼 노래는 무엇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