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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Jul 23. 2021

당신의 인생을 바꾼 노래는 무엇인가요?

END가 아닌 AND

그 겨울 어린 소녀는 마르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을 쏟았고, 연결이 안 되는 전화를 붙들고 손톱을 질겅질겅 씹었다.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질렀고, 밤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리움이 가득한 일기를 썼다. 그것은 태어나 그녀가 겪은 첫 이별이었다. 매달려 볼 재간도 없이 사라져 버린 한 남자를 향한 절절한 사랑이었다.



“엄마,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게 종로에 있는 교보문고에만 판대. 갔다가 올래.”


어느 날 대뜸 소녀는 엄마에게 교보문고를 가겠다고 말했다. 한 번도 혼자서 동네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버스로도 30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평소엔 조르지 않던 딸이 평소와 달리 간절하게 말하자 엄마는 몇 번을 신신당부하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다. 그날 소녀가 서울 한복판을 헤매며 찾아간 교보문고에서 사 온 책은 <서태지 죽이기>라는 대중음악평론서였다. 그 당시 소녀는 12살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그 어린아이가 읽기도 힘든 두꺼운 책을 사 와서는 과연 이해는 될까 싶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소녀에게 서태지는 종교였고, 처음 사회를 바라보게 한 눈이었다.


소녀는 반에서 어떤 존재감도 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아이였다. 딱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지만 그렇다고 따돌림을 받을 만한 일도 하지 않는 아주 무난한 보통의 학생. 그 조용한 아이가 일 년 중 몇 번 눈빛을 유독 반짝이던 때가 있으니 그건 가끔 학교에서 열리는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소녀는 어울리지 않게 노는 아이들 틈에서 열심히 춤을 췄다. 그것도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에만 유독 반응하던 아이였다. 그것도 모자라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랩을 연습했다. 마치 요즘 같으면 ‘쇼미 더 머니’에라도 나갈 사람처럼 종일 랩을 외우고 다녔다. 그때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는 교실 이데아였다. 존재감 없는 여자아이가 노래방만 가면 교실 이데아를 미친 듯 불러댔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국민학. 교에서 중학. 교로 들어가면 고등학. 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 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아주 모범적인 아이였다. 엄한 부모님께 반항 한 번 안 한 고분고분한 딸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처음 “반항심”이라는 것을 심어준 것도, 이 세상은 ‘네’가 아니라 ‘아니요’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준 것이 그의 노래였다. 인생을 진짜 멋지게 사는 법은, 체제에 맞서는 힘이고, 부당한 것을 참지 않는 것이고,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걸 그 어린 시절 배웠다. 소녀는 여전히 조용하고 수줍은 아이였지만, 해야 할 말은 어떻게든 하는 사람이 되었다. 평온하기만 하던 마음에 불꽃 하나를 품고 살 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까만 정장을 입고 훌쩍거리며 그는 말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fan 답게 늘 당당하시고, 자신을 사랑하며, 언제나 꿋꿋함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성통곡의 날들이 끝나고 정신을 차린 것도 결국 태지 오빠의 바람대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답게 멋지게 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멋진 어른이 되겠다고,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사람이 되겠다고, 당신을 힘들게 한 낡고 낡은 체제에 반기를 들고 살겠다고. 그때부터 소녀의 꿈은 대중음악 평론가였고,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더랬다. 이건 끝이 아니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테니까.

   

그 소녀는 자라서 마흔을 앞둔 어른이 되었다. 너의 인생을 뒤흔든 노래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지없이 서태지의 노래를 꼽을 거다. 그리고 그중의 한 곡이라면 그건 교실 이데아다. 사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이지만 나의 과거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시니컬하고, 목표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었다. 비록 그때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내 인생에 그 시절이 없었더라면 나는 좀 더 순종적인 아이로 컸을지 모른다.


요즘 BTS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음악을 좋아한다. 나는 그 무리에 동참하진 않았지만, BTS가 부르는 노래가, 그들의 세계관이 건강하고 아름다워서 좋다. 그들의 음악은 12살의 나처럼 누군가의 삶엔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을 테니까. 자기가 갖지 못한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줄 테니까. 노래 한 곡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나는 아니까.

  

오랜만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전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어깨춤이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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