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날 작가 Jul 13. 2021

여름이 오는 냄새

밤꽃 향이 진동하는 계절

바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아릿하게 느껴지는 냄새.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 그날 아침, 아이를 학교로 데려다주는 길, 나는 여름이 오는 냄새를 맡았다.

“아 푹하다. 연아야, 여름이다.”

“엄마, 푹한 게 뭔데?”

 

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궁금해하는 아이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음, 지금. 이 바람이랑 이 냄새가 주는, 이거. 이 느낌...”

말끝을 흐리는 내 말에 아이는 엄마가 집중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대번에 신경질을 냈다.

 

“아! 뭐야! 그게 뭔데!!!”

 

유독 엄마가 쓰는 단어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엄마의 불친절한 설명에 화가 났다. ‘푹하다’는 순 우리말로 겨울 날씨가 퍽 따뜻하다는 뜻이다. 그런 사전적 정의가 있는 줄도 몰랐고, 그 순간 나는 그 느낌을 푹하다고 표현했다. 삐친 아이를 달래기 위해 주절주절 나의 정체모를 단어에 대한 부가설명을 시작했다.

 

“연아야. 며칠 전까지 아침 등굣길은 조금 쌀쌀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어때? 바람이 막 따뜻한 물을 머금은 것 같지 않아? 엄마는 약간 물기가 있는 것 같은 바람에 이 밤꽃 냄새가 슬쩍 묻어나는, 이 느낌을 푹하다고 한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니. 모르겠어!”

 

아이를 학교 앞에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오는 길. 오롯이 혼자 남은 시간. 여름의 시작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밤꽃 향이 나는 계절은 바람도 살짝 무겁게 느껴진다. 겨울바람처럼 매섭지도, 여름 바람같이 눅눅하지도 않은. 작은 추 하나를 매단 것 같은 바람이 스친다. 유희열의 <여름날>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한다. 아마도 여름이 끝날 때까지 목록에 담겨있을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계절 안을 걸어 본다. 이 발걸음이 지독했던 어느 여름으로 데려가는지도 모르고.

 

고 3의 초여름, 그 계절은 생각만 해도 지옥이 따로 없었다. 지금은 교실마다 에어컨이 있지만, 그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벽에 걸린 선풍기 두 대, 앞뒤로 놓여있는 스탠드 선풍기 두 대, 60명의 아이들이 선풍기 네 대로 버티던 작은 교실.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창문을 열면 진동하는 밤꽃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고, 창문을 닫으면 더워서 쪄 죽을 지경이고. 안 그래도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아이들은 아주 작은 부딪침에도 있는 대로 감정을 표출하며 갑자기 변한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휴. 누가 여학교에 이렇게 밤나무를 잔뜩 심어놨어. 아주 발정 난 놈이 틀림없네.”

 

평소에도 말이 걸었던 윤리 선생님은 수업을 하러 들어오자마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반장을 찾았다. 지금 같으면 성희롱이라고 당장 따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순진한 고3 소녀들은 저 선생님은 왜 또 들어오자마자 헛소리를 하시나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세 아이 엄마가 된 지금은 너무 잘 아는 그 향기가 나는 계절이 오면, 여고생을 상대로 그런 저급한 농담을 하던 선생님은 잘 살고 계시나 안부를 묻고 싶어 진다. 그 해 여름은 진저리 칠만큼 지독한 밤꽃 향이 전부였지만, 덕분에 아직도 나에게 밤꽃 냄새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한참 추억을 거닐다 퍼뜩! 아이 학교가 끝날 시간이 됐음을 알아챈다. 왜 혼자인 시간은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 걸까. 파릇파릇한 고3 소녀는 어느새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멀리 걸어오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든다.

 

“엄마! 엄마!”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는 대번에 푹 한 게 뭔지 알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학교에서 그 생각만 했어?”

“아니! 내가 차에서 내려서 학교에 들어가는데! 엄마가 말한 그게 뭔지 알겠더라고! 나 이제 알아! 푹 한 거! 여름 냄새!!”

 

매 순간 아이는 온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나에게 부딪쳐 온다. 내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냈을 때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아니 괜스레 욕심이 난다. 아이가 이 계절을, 이 여름의 시작을 “엄마랑 나만 아는 단어”로 기억하면 좋겠다는 바람. 나이가 들어 ‘엄마의 푹하다’는 사실 진짜 푹하다는 말과는 조금 달랐지만, 엄마와 같은 느낌을 공유한다고 신났던 계절로 기억하면 좋겠다고.

예민하고 치열했던 어느 여름을 떠오르게 하던 밤꽃 향기는 이제 그리 고단하지 않다. 아이와의 사랑스러운 기억에 미소 짓게 되는, 조금은 기다려지는 여름 향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무 살 너에게 쓰는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