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경기를 즐겨 보지 않음에도 수영 경기는 꼭 보던 나였다. 전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엄청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자신의 레이스를 담담히 펼치던 박태환 선수가 아직도 기억난다. 10여 년 전, 취업을 앞두고 "저는 박태환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자기소개를 달달 외우고 다녔다. 수영이 취미이자 특기였던 나는 박태환 선수처럼 스트레스에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변덕스럽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라고 스스로를 줄곧 평가할 만큼 때때로 기분이 다운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주기적으로 한다. 밤낮 구분 없이 웹소설을 본다던가, 온갖 불량음식을 몸에 쏟아붓는다던가 하는 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10대에는 PC방을, 20대에는 만화방을 거의 "중독"에 가깝게 드나들었던 일. 이 모든 행동이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패턴이라는 것을 최근 알았다. 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 일들은 스트레스를회피하는 일이었다. 스트레스 상황을 잊어버리기 위한 행동을 마흔이 가까운 나이까지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회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인해 더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본인에 대한 환멸과 함께 스트레스의 굴레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복적인 자기 비하가 일어난다. 그래서 무시하고 싶었다. 그런 작은 감정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윤동주 시인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구가 떠오른다. '잎새에 이는 스트레스에도 괴로워하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한 순간 조금 객관적으로 스트레스라는 녀석을 바라보게 되었다. 감정 기복이라고 치부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나를 현실로부터 도망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 정체를 파헤쳐보기 시작한다.
최근의 스트레스는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못쓰는 괴로움이었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으면 해야 하는 일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래서 숨어버렸다. 이번엔 넷플렉스 안으로. 노트북 대신 스마트폰 앞으로. 그런데아주 빠르게 현실로 소환되었다. 채 빠지기도 전에 말이다.
평소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철저하게 밖에 나가지 않는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연락을 차단한다. 그런데 이번엔 그것이 쉽지 않았다. 정해져 있는 약속이 있었고 밖에서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대의 신뢰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응했던 만남들은 나를 그곳에서 빠르게 빠져나오게 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은 사람이었나 보다.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상대로부터 상황을 이해받으면 웅크렸던 마음에 생기가 돈다. 때로는 해결책을 얻고, 때로는 정서적 지지를 받기도 한다. 숨어있을 땐 알 수 없었던 어루만짐이다. 물론 스트레스에 스트레스를 얹어주는 만남은 애초에 시작을 말아야겠다. 더 깊은 동굴 안으로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이 나약한 중생에 대한 글을 써야지, 하고 브런치에 로그인을 한 지금 나는 또 깨달았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회피가 아닌 직면이라는 것을. 고민되는 순간 그냥 해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을. 꾸역꾸역 어떻게든 발행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넷플릭스 세상으로 가기 전에, 웹소설에 몇 만 원씩 쓰기 전에, 내리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 우선순위를 세우고 미뤄뒀던 일을 재빠르게 해결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1g의 스트레스도 같이 해소되었다.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한 뒤로, 나는 평소에 내 마음을 챙길 수 있는 여러 가지를 만들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쉽게 스트레스에 지지 않기 위해서. 후, 하고 불면 날아갈 멘털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나의 오타쿠 생활과 안녕을 고할 방법을 계속 찾아서 기록해 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