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동물을 키워본 적 있나요? 동물을 얼마나 알고 있나요. 어떻게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되었을까요? 어릴 적 아버지가 동물농장 만큼이나 많은 동물을 키웠지만 전 친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합니다. 아!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는데, 키우고 싶거나 좋아하진 않아서요.
둘째 아이가 아홉 살 무렵,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피부 알레르기와 비염에 좋지 않다는 핑계로 그 일을 미루고 미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 친구가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고슴도치를 분양 받았는데, 한번 키워보겠느냐고 했어요. 강아지를 키우는 것 대신 고슴도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흥미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죠. 짧은 생각에 고슴도치 두 마리를 덥석 받아 왔습니다. 아무런 지식과 경험이 없는 채로요.
고슴도치 두 마리는 모녀 사이였어요. 둘째 아이가 고슴도치 엄마의 이름은 모짜, 딸은 핏짜로 지었지요. 우린 커다란 리빙 박스로 집을 꾸몄습니다. 바닥에는 베딩을 깔고, 물그릇과 먹이통도 준비했어요. 친구 엄마의 말에 의하면, 고슴도치를 들어 올릴 때는 목장갑은 필수라고 했어요. 목욕시킬 때가 가장 어렵다고도 했고요. 겪어보니, 신기함과 즐거움은 5일이 채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작정 데리고 나가 산책시키고 목욕 씻기기를 반복하다 보니, 의무감 내지는 책임감만 들었던 거죠. 핸들링의 적응기간도 갖지 않고, 가시를 세우는 모짜 탓만 했어요. 제 감정은 두려움뿐이었고요. 교감 없는 부모나 마찬가지였던 거죠. 친해지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씻겨도 개운함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비릿한 냄새를 맡기도 어려웠고요.
한 번은 씻기다가 바짝 가시를 세우는 바람에 모짜를 떨어뜨렸어요. 어머나! 찌릿한 전기가 느껴지더군요. 소리도 없었고 꿈쩍도 안 했어요. 눈도 맞추기 어렵고, 말도 안 통하는데... 후회와 미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순간, 생명체를 키운다는 건 ‘취미가 될 수 없겠구나’ 하고 느꼈지요. 딱 한 달이 되는 날, 모짜와 핏짜는 할아버지 댁으로 돌아갔어요. 드디어, 저에게서 모녀가 해방되었어요.
가족이 되려다만 모짜와 핏짜는 공원 숲길을 너무 좋아했어요. 시멘트 광장을 가로질러, 야생의 숲길로 줄행랑치더군요. 야생동물처럼 자연에서 나고 자라는 ‘지구 안의 가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해야겠죠?
반면, 반려견과 반려묘라 부르는 개와 고양이는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어요. ‘우리 집 막내’, ‘내 동생’이라 부르는 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어요. 함께 살며 쇼핑하고 여행을 갈 정도니까요. 티비에 댕댕이의 재주나 길냥이의 활약은 아마 우리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 싶네요.
더욱 놀라운 건 개의 마음을 잘 읽어주는 개통령 강형욱 씨예요. 그는 ‘비글’의 마음을 헤아리고 달래면서, 우울증을 극복하도록 도왔어요. 사회성이 부족한 ‘골든 레트리버’를 도그 파크로 데려가 친구를 만나는 경험을 시켜 주었어요. 상대편 개를 공격하려다가 개통령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는 ‘닥스훈트’도 보았어요. 세상에! 언제부터 사람과 개가 이렇게 잘 통하는 사이였을까요? 어쩌면 사람과 개가 서로를 길들인 걸까요?
진화 인류학자이자, 신경과학자 브라이언 헤어의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친화력은 자기 가축화를 통해서 진화되었다라고. 가축화가 된 종은 작은 뇌와 이, 동그랗게 말린 꼬리, 접힌 귀 등으로 형질 변화가 생겼어요. 사회적 유대가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집단 내부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고요. 스스로 가축화가 되어온 거죠. 친화력이 높은 품종을 사람이 골라 길들인 것이 아니라 협력적이고, 문제 해결의 능력을 갖춘 종만이 야생 집단의 동질성을 강화시켜 살아남았다는 얘기죠.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높은 수준의 가축화는 사람이라는 것! 놀랍지 않나요? 만약 사람의 공감이나 협력을 주관하는 신경 메커니즘이 닫힌다면, 비인간적인 잠재된 속성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헤어는 말했어요.
누구나 인정 많고 품위 있는 상대를 원한다면, 앞으로도 사람과 개는 자기 가축화가 계속되겠죠?
추운 겨울, 고슴도치 두 마리가 온기를 만들어내려고 모였더니, 바늘이 서로를 찔렀다고 하는 우화를 아시나요? 가까이 갈수록 상처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여럿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해가며,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지요. 이를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답니다. 어쩌면, 사람이 사는 사회가 고슴도치와도 같다는 ‘행복론’의 기원을 뒷받침해주는 예가 자기 가축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공감과 소통 그리고 친화력이 유지되려면, 서로에게 적정한 간격이 필요하니까요. 우화가 진리일 수는 없지만, 서로를 위한 진리는 온기와 다정함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