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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일기장

by 빛작


마음의 두루마리가 한 무더기 풀어졌다. 멍해지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강인함은 오목거울 속으로 숨어버렸다.


쓰기 위해 모아 놓은 무채색 시간들과 쌓아 두었던 소소한 소망들은 대범하게 불빛 곁으로 기어 나왔다


뜨거웠던 뒤통수로 바람이 부니, 타일 바닥에 세차게 물 뿌리는 심정이다. 비누거품 속에서 밤의 카멜레온이 되는 것 같다.


오늘 밤 오토마타 인형의 업을 벗어던지자. 암탉 잎삭처럼 마당을 나와보니 딴 세상이다. 누구나 밟고 있는 이 땅 위에 이제 유채색 발걸음으로 희망을 써 가야겠다.


머뭇거림이 없는 나그네처럼 쉬어갈 줄 아는 야생마처럼!


햇빛이 클로즈업했던 어느 날의 일기장

(2019, 빛작)




구름과 향기와 소리는 뭉쳐진 곳으로부터 풀어지는 곳으로 이동한다. 가득 차 있는 쪽에서 비어있는 쪽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구름이 모아진 것은 고기압이라 부르고, 향기가 모아지면 고농도라 말한다. 소리가 모아지면 고성이라 하는데, 이들은 저기압, 저농도, 저성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우리의 의지로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는 현상이다.


모든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들 또한 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를 지니고 있다. 이 중 아버지들은 주로 ‘화’를 모았다. 그것은 어머니들에게 흘렀고 그로 인해 눈물로 내렸다. 어머니들에게까지 잔향 아니 잔화의 낌새가 느껴졌던 날이면 우리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자주 고기압이었다.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니들이 잘못하는 상황이 아님에도 하필

어머니들이 선택되어 화를 받아내야만 했다.



이삼십 대이건 사오십대이건 우리들 눈에 아버지들은 그렇게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외롭고 고집스럽고 화를 내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이었다.



왜 싸움은 오 년 십 년 이어져, 어린 시절 우리들의 감정과 정신을 건드렸을까? 그 어떤 정신이 스며들었길래 아버지를 뺀 나머지 속에서 남편을 찾으려 했고, 어머니를 뺀 나머지의 아내가 되기를 갈망했던 것일까?


모든 사람은 정신을 갖고 있다. 어머니들은 감정을 누르는 대신 정신을 키워갔다. 인생의 반을 슬픔으로 채웠다. 아버지들에게서 흘러온 슬픔으로 눈에는 회한이 담겼다. 아버지들 뒤로 잔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날 우리들은 오목거울 속으로 숨었다.



맑은 하늘의 구름은 여유롭기만 한데, 화와 슬픔은 두려움의 먹구름에 갇혀있었던 걸까? 좋은 향기와 소리는 잔잔하기만 한데, 정신의 뿌리는 약하디 약하여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 걸까?



성숙이란, 무채색의 과거 위에 유채색을 입힐 수 있는 현실이 아닐까?





가장 중대한 인생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런 문제들은 절대 해결될 수 없으며 다만 성숙하게 됨에 따라 털어낼 수 있다. - 카를 구스타프 융


화는 나약한 자신의 표현입니다. 나약한 자신에게 기대지 마시고 강한 자신을 찾아내야 합니다. 감정은 체계적인 정신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감정 말고 정신을 다스리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 작가 지담



* '화'와 정신활동에 대한 '엄마의 유산' 라이브 방송 청취 후 소회입니다.

* 독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출처 : 작년 12월에 북악스카이웨이를 오르다 발견한 푯말을 찍어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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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카멜레온 #나그네 #오토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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