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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작 Feb 03. 2021

시인과 과학자...'실험러'들의 실천

'과학실에서 읽은 시'를 읽고



실험실은 나에게 특별하다. 기기와 매뉴얼을 통해, 결과를 얻는 과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료 하나, 의뢰 시험 기간 동안의 하루, 나의 두 손에 주어지는 노력과 시간들은 달랑 몇 장의 보고서로 완결되지만 때마다 주체적인 그 시간 속으로 정신이 팔린다.


다음 실험의 영감들이 솟아오른다. 도미노로 세우면  좌르륵 이어지듯, 큰 그림의 그 쾌감과도 같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시인과 과학자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 두 사람은 편견을 깨고 사물을 새롭게 인식한다.


연결 짓기가 참 애매한 '시와 과학'의 관계 짓기를 나 또한 경험한 적이 있다. 실험을 하다 말고 시를 썼다는 얘기는 아니다. 같은 모양의 시험관 수십 개에서 오색찬란한 반응 색들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제 각각의 성질과 색으로 표현되는 실험실 동료

들을 떠올렸을 딱... 그 정도였다.


책에 소개된 가장 짧은 시를 옮겨보자면, '하이쿠'(일본 전통 시가) 한 편을 저자는 과학자의 눈으로 바라본다.

    홍시여        <나쓰메 소세키>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홍시여>는 어떤 눈으로는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속담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랬다. 홍시이기 전에, 어떠한 감도 었을 텐데,  지금 달달한 인생이라고 해서 었던 지나간 그때를 잊지 말아라, 누구나 떫었던 때가 있으니 자만하지 말라. 바로, 이런 겉보기 해석이 재깍 나온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하상만 교사는 감이 떫은맛이 나는 것은 '탄닌' 성분 때문이라고 분석?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 은 감을 소금물에 담그시던 할머니의 생활 과학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이 성분이 소금물과 만나 반응해서, 녹지 않는 탄닌으로 바뀌는 것이다. 마치 고체인 막대사탕의 단맛보다 입안에서 녹아 액체로  맛을 볼 때 단맛을 더 잘 느끼는 상황을 빗대어 설명한다.



실험실 방 안의 공기와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 분침에도 느낌 있게  대하는 날이 어색하지 다. 전자저울이 수평을 이루는지, 저울의 문은 제대로 여닫히는지, 핀셋은 깨끗한지 등 실험러들의 눈과 손의 섬세한 의무감이 발휘되어야만 한다. 


 시료의 무게를 재서 샘플링을 한 후, 퍼니스(열처리 가마)에 일정 시간 둔다. 다시 꺼내 휘발성분을 뺀 무게를 재야 하는 돌고 도는 수많은 업무 중 하나다. 여느 주부나  학생, 직장인의 반복된 하루와도 같다.



작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글의 재료인 낱말 하나맥락에 맞도록 무게를 잰다. 너무 가볍거나 

과하지 않게 골라낸다. 외래어와 사투리도 적당하게 휘발시켜 자리를 잡아놓는다.


실험보고서에는 때와 장소와 대상이 있다. 마찬가지로, 한 문장 안에는 때와 장소가 들어있다. 때론 가설과 결론을 포함하는 글 한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과학실험이 실험 순서와 방법을 실천해가듯이, 작가는 글을 쓰는 의도와 순서를 매번 고민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번 글의 아쉬움을 다음 글에 반영하는 일종의 '글의 실험러'가 아닌 듯싶다. 그래서, 다작이라는 말은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여 이루어지는 '태산'처럼 다가온다.


고 쓰는 일에는 새로운 환경설정이 꼭 필요한가 보다. 과학실에서 시를 읽으면 어떤 가설이 나올지, 어떤 관점으로  길고 작고 많음을 바라볼지가 궁금해서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시료일 때부터 관찰하고 결과를 해석하는 모양은 시인의 시선과 의미 부여에 꼭 맞기도 하다.


시인과 과학자는 새로운 발견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홍시를 바라보면서, 초심과 겸손을 느낄 수 있는 시인, 그 시를 보고 '탄닌'성분의 반응을 설명할 수 있는 저자의 시선을 닮아가고 싶다. <사진출처: 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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