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나온 월셋방

장래 희망은 월세 탈출

by 나날
누군가 나에게 장래 희망을 묻는다면 월세 탈출이라고 대답하겠다.


나 역시 월세 탈출이 꿈이었다.


오롯이 내 돈으로 월세를 내기 시작한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선릉역 근처에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65만 원 하는 원룸을 구했다. 당시 월급으로 감당하기 빠듯한 수준이었지만 학교 근처 원룸도 40~50만 원을 내야 했다. 출퇴근 교통비와 시간을 떠올리며, '그래, 20만 원 더 내자'고 생각했다. 막상 내 돈으로 월세를 내기 시작하니 그 65만 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럴 땐 그냥 하루에 2만 원, 3만 원씩 돈을 쓰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월세를 일세로 나누며 3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래 오늘은 비싼 곳에서 친구랑 같이 저녁 먹고 내가 쐈다고 생각하자.' 현실은 야근하느라 회사 근처에서 먹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처량하기 그지없다.


같이 입사한 동기 모임에서 내가 월세 65만 원짜리 방에서 산다고 하니 다들 나를 무슨 철없는 막내 동생 보듯 했다. '한 달에 월세 65만 원을 내면서 살다니.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월세에?' 나는 그저 출퇴근 걸어서 할 수 있는 거리에 내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 갖춰진 방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 방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해서 다른 방 대비 깔끔했고 옵션도 웬만큼 갖춰져 있었지만 불법 개조를 한 것인지 아무튼 전입신고를 할 수는 없었다. 월급을 받아 이것저것 정산하고 남은 돈을 보며 이대로 계속 가도 좋은 것인지 불안한 미래에 생각이 많아졌다. 월세만 안 내도, 그 돈만 모아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일 것 같았다. 일단 전세 보증금만 모아보자고 생각했다.


2년이 지나고 대치동에 다른 원룸으로 옮겼다. 여전히 월세였지만 보증금이 그래도 천만 원 단위로 올라가니 월세가 1/2 수준으로 줄었다. 이곳도 신축이었지만 방은 더 좁았다. 조금 넓은 고시원 정도 크기였다. 수납공간도 마땅치 않아서 신발장을 책장 삼아 썼다. 다행히 나는 신발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한쪽 벽을 길게 차지한 신발장 한 칸이면 충분했다.


이곳은 집주인과의 에피소드가 많다. 예전 방은 집주인이 먼 곳에 살고 있어서 계약할 때도 부동산 중개인이 대리로 도장을 찍었고 한 번도 직접 연락한 적이 없었다. 대치동 원룸의 주인은 70대 노부부 셨는데 건물 맨 위층에 살고 계셨다. 주인 할아버지께서 예전에 어느 병원 의사였다고 했다. 월세 수익으로 생활하시기 위해 땅을 사서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지으셨단다.


나는 이곳에서 강남 부자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단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때까지 내가 생각해온 70대 노인의 외형은 아니었다. 주인 할머니는 계약할 때 모피코트를 입고 운동하러 갈 시간이라고 빠르게 도장을 찍고 계약금을 확인하시곤 이사 때 보자며 쿨하게 사라지셨다. 노부부의 딸 역시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어 자주 들락날락했는데, 그녀 역시 40대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놀랐던 부분은 그게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억지로 젊음을 유지하려 노력해서 얻은 얼굴이 아니라 당연히 주어진 것인 듯 밝고 생생한 얼굴.


노부부는 여유로운 듯 보였지만 실은 마음이 좁고 무례하고 또 한편으론 외로웠다.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면 롤케이크 같은 걸 집집마다 선물이라고 돌렸는데 그때마다 당연하듯 방에 들어와 방 상태를 곁눈질로 체크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덕분에 알고 싶지 않은 집 공사 업체와의 소송 이야기며 자식들 얘기까지 어정쩡한 자세로 들어야 했다. 그 대화의 끝에는 방을 깨끗하게 사용하라는 당부의 뉘앙스가 담긴 말이 달라붙었다.


하루는 1층에서 주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분은 대뜸 내게 반말로 말을 거셨다. 그곳에 있는 건 나밖에 없었으나 정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아서 내게 말을 한 것인지 살짝 헷갈렸다.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반말하지 말라고 에둘러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외국에 있는 손자 얘기를 꺼내셨다. 요약하면 자식들 공부시켜 놨더니 다들 외국에 가서 살고 있고 손자들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자기를 무시한다는 한탄이었다. 그것과 당신이 내게 반말을 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모든 것이 다 피곤하게 느껴진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방으로 들어왔다. 고약하다면 고약하게도 그 이후로 그를 보면 그냥 유령처럼 지나쳤다. 내겐 한뼘의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 집에서는 계약 기간을 6개월 정도 남기고 이사를 했다. 월세 탈출, 전세 시작. 서울이 아닌 분당이었기에 가능했다. 판교로 오피스가 이동하면서 분당에 방을 구했고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빠듯하게 전세 보증금을 맞출 수 있었다. 월세를 내지 않는 삶으로 넘어갔지만 월급의 대부분을 월세로 내야 했던 시절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20대 내 꿈은 의식주, 생존과 밀접하게 닿아있었다. 그것 외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그저 애틋할 따름이다. 물질적으로는 빠듯하지만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나는 좀더 부드럽고 도전적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래 희망을 묻는다면 월세 탈출이라고 대답하겠다. 월셋집 말로 전셋집에 산다면 지금보다 덜 두려운 마음으로 노동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심신 단련 이슬아 산문집, 이슬아, 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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