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타샤 튜더는 장수한 화가였다.
부러웠다.
장수가 부러운 건지 화가였던 것이 부러운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1915년에 태어나서 2000년을 훌쩍 넘겨서 눈을 감았다.
저렇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야.
옆에서 일행이 속삭인다.
거봐, 자급자족했다잖아.
그녀는 스스로의 말을 확신하듯이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등이 굽고 자그마한 화면 속의 그녀는 서기 2천 년에도 1900년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펌프 하며 램프 하며, 그녀의 삶은 서부 개척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바느질하고 정원을 가꾸고 음식을 만든다.
이 단순한 일이 그녀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꽃이 만발한 정원은 그녀의 삶이 게으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정원을 가꾸지 않는 나도
하루만 손길이 닿지 않아도 잡초와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강렬한 색감이라고는 1도 없는 그녀의 그림은 그래서 편안하다.
소녀의 감수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꽃이 만발하고 동물이 화폭을 가로지르고 사람들은 온화하다.
동화의 삽화여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평생을 저렇게 살았다면 도를 넘나드는 파격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숨을 쉬듯이 편안한 그녀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휴식으로 이끈다.
무해한 그녀의 그림은 낯선 이에게 독약을 건네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한 잔의 청정한 감로수를 맛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화려함과는 정 반대의 사분면에 수수한 그녀의 그림이 있다.
성형하지 않지 않고 분칠 하지 않은 힘을 뺀 그림이다.
박완서작가의 얼굴이 생각나는 그림이다.
어린 시절, 나는 공주풍을 좋아했다.
읽었던 동화책에 모두 공주가 나와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집의 양육방침은 레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이스와 부풀고 풍성한 실루엣을 동경했던 나는 절망했다.
지금도 나는 레이스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머리에 리본을 달고 부푼 실루엣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이 나오는 타샤 튜더의 그림은
그래서 더 좋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그녀는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독립적으로 일했으며 옷을 만들고 음식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림까지 그렸다.
하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너무 짧으니 불평하며 보내기엔 시간이 아깝다.
그렇다.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