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그늘

어서 빨리 양달로 나아가자

by 루시

일을 하다 보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긴다.

모두 모여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헤어져도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남을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은 어딘가에 모호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무라는 것이 항상 crystal clear 할 수 없기에 일정 부분은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이런 일은 특히 이해관계자가 다수일 때 더 많이 발생한다.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르듯이

이 회사와 저 회사의 생각은 당연히 다르다.

관점도 다르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방법도 다르다.

다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율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입장에 있다 보면

엄청, 개, 피곤하다.


한 관계사에서 무척 좋은 조건이라며

우리 모두 합심해서 공동 프로젝트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우리 관계사들도 동상이몽이었고

상대 회사는 더 달나라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던 나는 다시 초심을 다지며

이 프로젝트는 성사가 어렵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랄 맞은 일이 항상 그렇듯이 성가신 일은 업무 시간이 아닌 휴일에 발생했다.

더 최악이었던 점은 여행 일정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점이다.

물론 여행지에서 일하는 것을 불평하지는 않는다.

톡과 문자와 메일, 텍스트로 주고받는 업무는 그냥 하고 있다.

교토 덴류지에서 고요한 정원을 바라보면서 업무를 할 때는 집중도 잘 되고 업무 만족도도 높았다.

사람은 많았으나 분위기의 차분함이 여행지 업무 만족도 '극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행하게도 그런 행운이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신칸센의 통로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30분간 통화를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동시에 기차를 갈아타야만 했던 나는,

통화는 하고 있었지만 입안은 바짝 마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사히 통화도 끝내고 열차 갈아타기에도 성공한 후에

아사히 캔맥을 벌컥벌컥 식도로 흘려보냈다.

여행 내 술은 한 모금도 하지 않았지만

귀국 하루 전날 나를 찾아온 업무에 숙소에 들어가서도

기린 캔맥으로 화풀이하듯 음주를 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은 근래 들어 가장 많은 폭음을 한 날로 기억된다.

그래도 이 전화가 여행 첫날밤이 아닌 마지막 날에 찾아온 것에 감사하며

애써 위로했던, 나를 다독였던 기억이 난다.


꺼림칙한 일은 항상 뒤에도 그 찌꺼기를 남긴다.

그래서 업무를 하면서 뭔가 석연치 않으면

이제 조용히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한다.

적어도 스스로는 납득하고 업무를 해야 뒤탈이 없다.


여태까지는 여행지에서 텍스트로 업무를 해왔다면

이제는 통화까지 해가면서 여행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은 소중하니까 불평할 입장은 아니다.


상사가 금요일에, 주말에 고민해 보라며 숙제를 냈다.

딱히 워크홀릭은 아니지만 공사 구분 없이 일은 내 생활을 관통한다.

그런데 상사가 명확히 숙제를 낸 순간,

내 마음에는 커다란 그늘이 졌다.

여행지에서 생긴 것보다 더 짙은 그늘이다.

내일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숙제는 내일 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토요일은 일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항상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일할 수는 없겠지만

주말에 숙제까지 받은 입장에서

내리쬐는 봄볕을 보고 있자니

뭔가 억울한 기분이다.


안돼, 그래 봤자 그냥 일일 뿐이다.

그늘지려는 마음을 얼른 양달로 쓱 밀어 본다.